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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밥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는 국민을 시인으로 만들었다

by 밥이야기 2009.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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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결식까지 남겨진 100만송이 국화,100만 송이 추모글




영결식. 고인이 마지막 가는 길. 당신이 서거 한 날부터, 오늘 영결식까지. 당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화꽃과 추모하는 글들이 세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100만 송이 국화와 댓글(추모글)은 상징입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내며 추모시를 썼던 시인 고은의 ‘만인보’처럼. 고인을 기리는 추모 글들은 보면,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된 것 같습니다. 때로 슬픔은, 이렇듯 사람들의 마른 감정의 샘을 다시 일게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시인의 사회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영결식을 하루 앞둔 어제(8월 22일)만 전국 180여 개 분향소에는 17만 명 넘는 추모객이 몰렸습니다. 인터넷 주요 포털(다음, 네이버, 네이트)의 추모 게시판만 해도 지금 30만개의 가까운 추모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아마 다른 사이트까지 합친다면 추산컨대 50만개가 넘을 것 같습니다. 오프라인의 추모 글까지 합치면 100만개 가 넘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우리입니다(가사/고은:작곡,노래/신형원) 

1.

당신은 민주주의입니다.

어둠의 날들

몰아치는 눈보라 견디고 피어나는 의지입니다.

몇 번이나 죽음의 마루턱

몇 번이나 그 마루턱 넘어

다시 일어서는 목숨의 승리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자유입니다. 우리입니다.

2

당신은 민족통일입니다.

미움의 세월

서로 겨눈 총부리 거두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그 누구도 바라마지 않는 것

마구 달려오는 하나의 산천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평화입니다. 우리입니다.

3

당신은 이제 세계입니다.

외딴 섬 아기

자라나서 겨레의 지도자 겨레 밖의 교사입니다.

당신의 고난 당신의 오랜 꿈

지구의 방방곡곡 떠돌아

당신의 이름은 세계의 이름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내일입니다. 우리입니다.

이제 가소서

길고 긴 서사시 두고 가소서.

 


 

김경춘 2009-08-23

부디 영면하십시요 당신의잘못이라면 이나라에 태어난게 잘못입니다 너무똑똑해도 안되는 나라 노벨상을 타서도 안되는 나라 그래도 당신은 이나라를 참 많이 사랑하신것 같습니다 당신과 함께 숨쉬며 느끼며 살수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다음생에선 이런나라에 태어나지마십시요 넓은나라 큰나라에 태어나셔서 당신의 못다한 꿈 펼치시고 이루소서 영면하십시요





포털 다음(DAUM)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추모사이트 게시판.

82199개

추모글을 읽다보면, 글은 짧지만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주옥 같은 글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210075개의 추모글

네이버는 추모게시판에는 추모글도 많지만, 추모와 관계없는 글들도 많이 올라와 있다.




네이트

추모글 86,948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공식 사이트(카운터는 없음)


 
* 사진출처 : 민주당

 

온,오프라인 추모글만 모아도 지구 몇 바퀴를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지석(誌石) 문안

 

公의 성은 金氏, 본관은 金海, 휘는 大中, 호는 後廣이다. 1924년 1월 6일(양력)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 어머니 장수금 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암서당과 하의도 보통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대중의 영특함을 살리기 위해 목포로 이사했고, 대중은 전학 간 목포 북교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39년 5년제 목포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목포에 있는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사업에 성공하여 유망한 청년실업가로 명망이 높았다.

1945년 차용애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50년 9월 목포형무소에 갇혔다가 인민군들의 무차별 학살극에서 극적으로 탈출, 살아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와 부산 정치파동을 현지에서 겪으며 정치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6년 장면박사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듬 해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이다. 선거에서 거푸 낙선을 하다가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의원의 꿈이 무산되었다.

1962년 5월 정치적 동지인 이희호와 결혼했다. 1963년 11월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요한 낙선 공작에도 당선되어 이름을 떨쳤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대통령후보로 뽑혔으나 이듬 해 치른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했다.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 중 승용차가 대형트럭에 받혔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제2의 쿠데타가 일어나 망명길에 올랐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해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국에 끌려와 오랜 기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 세력에 잡혀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미국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구명 운동으로 감형되어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1985년 망명 생활 2년 만에 귀국을 강행, 198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제1야당 총재가 되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패배했다. 그해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을 설립하였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1998년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열었고, 그해 12월 한국인으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3년 2월 퇴임하여 서울 동교동 사저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86세를 일기로 서거하시었다. 퇴임한 국가 원수로는 처음 국장으로 모셔졌고,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히셨다. 자손으로는 아들 홍일, 홍업, 홍걸이 있고, 손자와 손녀는 지영, 정화, 화영, 종대, 종민, 종화, 종석이 있다. 수많은 학위를 받았고, <옥중 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