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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는 불독이다

톨스토이가 다음뷰 블로거였다면?

by 밥이야기 2009.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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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거는 아나키스트다

 

아나키즘의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나르코스는 ‘선장이 없는 선원’이라는 뜻이다.

아나키스트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다. 혁명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산악당은 자신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반대파들을 아나키스트라 부르면서 무질서나 혼란을 일으키는 나쁜 사람들로 몰아붙였다.

<'아나키즘/하승우지음,책세상 - 발췌>

 

아나키즘이라는 말을 들으면 첫 번째 떠오른 말이 무정부주의. 두 번째는 테러리스트. 세 번째는 공산주의에서 소수파로 전락한 준 빨갱이? 아나키즘은 아직 사상의 마이너리티(소수자로 해석)다. 그런데 맞으면서도 틀린 말이다. 아나키스트라고 표현을 안 할 뿐, 아나키스트들은 어쩌면 침묵하는 다수일 수 도 있다. 아나키즘은 단순하게 몇 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아나키즘은 새롭게 재조명, 재해석해 될 필요가 있다.

 서구 물을 먹은 아나키즘이 국내에 들어 온지 100년이 다되어간다. 아나키즘은 서구의 용어지만 동양의 사상(묵자 사상 등)과 닿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된 시각에서 이데올로기의 파생 사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만물이 변하듯, 사상도 변한다. 아나키즘 또한 시대에 따라 변했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정지된 이념이 아니다. 끝없이 국가와 제도, 권력의 폭력에 저항하고 발언하는 생각과 실천의 유기체다.

 

톨스토이는 비폭력 아나키스트

19세기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이자 사상가, 개혁가였던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기독교적시각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여러 혁명(왕정타파)들은 시민권을 강화시켰지만, 반대로 국가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자본주의의 폐단이 심화되면서 사회주의사상이 등장하고 계급 간 갈등과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폭력에 기반을 둔 모든 혁명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톨스토이의 사상은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톨스토이는 '오늘날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사소한 물질적 만족과 자유와 명예를 파는 이기심과 정신적 마비'를 질타하며 사회구조(국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주장한다. 국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황당함과 두려움이 엄습해 올 수 있지만, 사실 국가는 애국심이라는 구호로 사회적 약자들을 끝없이 착취하고 종속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애써 잊거나 피해가고 있을 뿐. 국가의 '폭력'은 탄압과 투옥, 고문, 착취를 넘어 국민의 눈을 속이는 거짓교육과 현실왜곡의 술수와 국가가 만든 제도(법)를 포함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 톨스토이의 국가에 대한 고발과 저항은 그리스도의 도덕관이 반영된 혁명이다. 이 혁명은 순식간에 타오르는 폭력에 의한 혁명이 아닌 기나긴 여정의 내면적(자신부터 변화) 혁명이다. " 이 혁명은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이 혁명이 인류에게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 가운데서 이 혁명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인류를 변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정작 아무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톨스토이가 물질만능주의 산업화를 넘어 설 대안을 농업에서 찾고 있는 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우리시대의 노예제>에서 톨스토이는 세상의 모든 현자와 시인들은 인간행복의 이상을 언제나 농촌 생활의 조건 안에서 찾고 있다. 농업은 건강하고 다양성을 제공하는 일이다. 공장 일은 부차적인 반면 농사일은 일차적이다. 농업이 없으면 공장은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톨스토이와 촛불시위

톨스토이가 만약 웹2.0시대의 블로거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촛불시위는 자발적 시위문화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의견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나키즘의 정신과 지향이 오롯이 담겨있다. 톨스토이가 21세기를 살았다면 아마 가장 열렬한 아고라의 발언자이자, 옹호자였을 것이다. 블로거의 관심 영역은 광범위하다. 아나키즘이 그러하듯, 고정적인 틀을 거부한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한다. 눈물 젖은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성 안에 이성이 존재한다. 톨스토이가 촛불시위를 보았다면, ‘전쟁과 평화’가 아니라 ‘촛불과 평화’를 집필했을 것 같다.

인터넷이 없는 공간에서도 톨스토이는 실험적인 공동체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만약 오늘 같은 정보화 시대에 톨스토이가 살아 있었다면, 공동체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졌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보았다면 아마 “삽질이여 잘 있거라”를 집필하면서 4대강 살리기의 부당성을 지적했을 것이다. 사회생태주의자였던 머레이 북친이 이야기 했듯, 개발읕 통해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고 보전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일깨워 주었을 것 같다. 녹색성장 이전에 환경위기나 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사회체제를 바꾸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고.

웹2.0은 참 정신은 무엇일까? 공유, 연대, 참여의 소통구조가 아니라 민주주의 정신이다. 민주주의 역시 완성과 결말이 없다. 인간을 향한, 인간을 위한 사람 사는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아나키즘 또한 자유로운 인간 세상을 만들길 위한 끝 모를 항해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전 세계의 블로거들과 네티즌들은 매일 매일 생각을 나누고 현실발언을 하고 있다. 기성제도와 체제에 대한 단순한 거부가 아니다. 제도에 묶여 살고 있지만, 제도 밖에서는 제도의 비합리성과 폭력성을 거부하고 있다. 댓가를 바라는 글쓰기가 아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며, 관섭의 틀에서 벗어난 자유정신이 묻어나 있다.

국가가 모든 것을 해준다는 것은 이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억압적 상황은 비민주적이며 시대의 흐름과 역행하는 것이다. 결국 다수가 다수를 위해 지혜를 만들어 내는 이상적인 날에 가깝게 다가 설 수 있을 것이다. 그 날도 역시 완결이란 없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발언하는 새로운 톨스토이들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 -바쿠닌-

아나키즘은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반강권주의’라고 표현한다. 아나키즘은 국가만이 아니라 시장의 폭력과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 등 강압적인 모든 권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일방적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민중에게 이론을 강요한다면 그들을 종속된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킬 것이다.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타자를 위해 일한다는 건 동정이 아니라 그를 위해 자신의 장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고 타자가 스스로 일어나 싸워 모순을 제거할 때까지 자신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연대는 바로 그런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전위 조직과 중앙 집권적인 국가 권력을 부정한다. 단순히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정치혁명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삶 자체를 바꾸는 생활의 혁명, 사회혁명이 필요하다.

  <'아나키즘/하승우지음,책세상 - 발췌>

* 참고서적 : 아나키즘(책세상), 국가는 폭력이다(달팽이), 촘스키의 아나키즘(해토), 다중(세종서적)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