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밥

안중근, 박정희, 황우석 3인3색

by 밥이야기 2009. 10. 27.
728x90






어제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자, 1박 2일 은초딩이 참여한 박정희 추념식 30주기. 죽은 자를 기념하는 날이었고, 황우석 박사가 법원의 심판을 받는 날이었다.

 ‘그 때 그 사람’이 하루 동안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야 딴죽 건 사람 없었지만, 죽은 박정희와 살아있는 황우석은 공방에 휩싸였다.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다. 압박된 조국의 사슬을 풀기위해, 삼천리 방방곡곡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불태우기에 총을 쏘았다. 비합법적 합법이었다. 평화주의자였던 간디가 보았다면 고개를 저을 수 있었겠지만, 안중근 의사도 평화주의자였다.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던 운명. 김구를 죽였던 안두희는 사형당하지 않았지만, 안중근 의사는 의거했다. 세상일이 이렇다.

 
박정희. 한국현대사를 압축적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이야기 한다.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다고. 과연 그런가. 조갑제는 자신이 운영하는 매체에 박정희 30주면 추념식에 대한 감회를 길게 적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참 괴로웠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알 세례를 받고 숨졌을 때 나는 학교 교실에서 눈물의 강요를 받았다. 강요였다는 것을 철든 뒤에야 알았다.

 
왜 박정희의 그늘은 우리 사회에 넓게 드리워져 있는 걸까? 박정희는 독재자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박정희에 대한 예찬은 독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독재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맞수 김대중을 죽일 수도 있었고, 합체합일 새마을 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국민은 우매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억압적 통치는 사람들을 양으로 만든다. 털을 깎아 내어도 소리 높여 울거나 저항 할 수 없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만들었고, 노태우를 가능하게 했다.

 
압축적 천민자본주의는 반세기 한국을 끌어왔다. 독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유와 민주에 저항했다. 지금의 갈등 원천은 분명 과거 군사정권에 있다. 경제발전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경제발전이었는가? 누구를 희생시키면 만든 성장인가. 성장의 그늘을 이렇게 깊고 넓게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세계의 모든 독재자들은 국가지상주의와 성장을 이야기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최후는 어떠했는가. 따질 가치 없는 박정희 예찬론은 노예주의의 발로다.

 
만약 당신에게 총칼을 맡긴다면, 당신은 박정희보다 잘 할 수 있다. 무기의 정권이다. 무기 앞에 사람은 손 들 수밖에 없다.

 
황우석. 법원은 하나만 빼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황우석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박정희를 떠올리는 사람보다 더 낫다. 왜냐면 그는 생명을 살리겠다는 신념과 맹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을 했다. 생명을 다루는 사람의 위선은 사람을 죽게 만든다. 거짓 희망은 사람을 끝내 절망의 벼랑에 끌고 가게 만든다.

 
3인 3색. 각기 다른 세 사람의 운명을 보면서, 언론의 비빔밥 글을 읽으면서 기억을 지우고 싶다. 우상은 없다. 존경과 맹목적 우상의 개념을 흔들어 놓은 지난 하루가 빨리 지워졌으면 좋겠다.



* 공감하시면 아래 손가락 모양 클릭 - 더 많은 사람들과 관련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