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고은(본명: 고은태) 시인이 선정되었다. 한국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자, 노벨문학상은 처음. 아시아 작가로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1913),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 오엔 겐자브로(1994)에 네 번 째 수상자이다.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1901년 프랑스 출신의 시인 쉴리프뤼돔. 프랑스는 지금까지 가장 많은 14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고은 시인은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을 때마다 수상자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턱에서 돌아서야 했다. 그래서일까 오늘 고은 시인은 노벨문학상 발표 당일에 언론사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고은 시인의 자택 앞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바라는 플랜카드만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2. 한국 현대사의 생생한 기록을 만인의 이름으론 노래한 시인 고은
시인 고은은 1993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군산중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4학년 때 중퇴했다. 젊은 날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1954년 고은은 입적했다. 법명은 일초. 12년간 승려생활을 했다. 불교신문도 창간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환속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1958년 시 <폐결핵>을 현대시에 발표, 등단한다. 작고한 시인 김수영은 고은 시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
. 고은의 초기 시는 탐미적·유미적 경향이었다. 하지만 암울한 한국 정치 현실은 그를 실천하는 시인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1973년 박정희 정권 3선 개헌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백낙청, 황석영, 염무웅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1980년 518 광주항쟁 직후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사건에 연루, 군법회의에서 20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의 길은 한국 민주화 고난의 길과 함께 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시인 고은은 지금까지 150여권에 가까운 시집과 책을 세상에 선보였다.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었다. 다작의 시인. 투사와 시인의 역할을 함께했던 시인 고은 특히 1986년 쓰기 시작한 만인보는 최근 30권 연작시집으로 결실을 맺었다. 3800여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한국현대인물사라는 평을 받는 대작 만인보. 만인보에 수록된 인물처럼 고은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면 살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품어내었다. 시인 고은은 정선아라리를 좋아했다.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내 아리리공원에는 그의 시비가 있다.
“1960년대 말 내 니힐리즘이 무척이나 지쳐있을 때 내 전생 또는 고대의 기억인 것처럼 정선아라리에의 매혹이 나를 자주 달래주었다. 정선아라리에는 적어도 그 본 줄기에는 봉건시대적 근본주의가 끼어들지 않는 오랜 본래 면목의 자유가 들어 있는 사실을 짐작했을 때의 기쁨은 거의 구원에 가까운 노릇이었다. 그런 정선아라리의 첫 체험은 나에게 제주도 시대 이래 또 하나의 정신적 흑점으로서 어떤 빛깔로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정선은, 정선아라리로서의 미학은 내 문학의 바로 옆에 있게 된 것이다." (2006 아라리문학축전 행사에 보낸 고은 시인의 메시지 중에서)
아스라이 아스라이
성마령 넘어
어이 돌아오지 않으리
그대 정녕
정선 아라리 넋이거든
천 년 세 월
이 산 저 산 메아리로
어이 눈부시게
돌아오지 않으리
-<정선 아라리> 고은
3. 노벨문학상 수상이 갖는 의미
노벨문학상은 지금까지 유럽 중심의 작가들이 선점했다. 그렇기에 시인 고은의 수상은 그 의미가 크다. 다른 노벨상에 비해 문학상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많은 주목을 박을 수밖에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되면 전 세계에 수상자의 주요 작품이 언론에 소개되고 판매된다. 한국 문학을 전 세계에 알리는 가장 중요한 창구역할 하는 셈이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흔히 문화대통령(문화대사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파급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매번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나서 서점에 진열된 외국의 작가들 작품을 보아왔다.
최근 고은 시인은 언어를 통해 남과북의 물꼬는 틀 수 있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이 정부의 예산 중단되는 상황에 이르자,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 이사장은 시인 고은은 말했다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는 동서독이 힘을 합쳐 <괴테사전>을 만들었고, 중국과 대만은 <양안사전>을 만들어 말의 길을 열어가면서 통일의 순간을 기다렸다. 무엇보다도 사전과 같은 비정치적인 학술교류마저도 막힌다면 민족과 국가의 품격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한글이 없었다면 고은의 시가 빛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강이 어머니(대지)의 젖줄이듯,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어머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계기로 <겨레말큰사전>이 다시 빛을 보기를 기대한다.
고은 시인이 연단으로 나왔다. 노시인은 기품과 열정으로 만찬장을 압도했다. “오늘 아침 숙소에서 우리 민족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대동강 앞에서>라는 시를 낭송했다.
무엇하러 여기 왔는가
잠 못 이룬 밤 지새우고
아침 대동강 강물은
어제였고
오늘이고
또 내일의 푸른 물결이어라
때가 이렇게 오고 있다
변화의 때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길로 오고 있다
변화야 말로 진리다(중략)
시인은 절규하고, 시는 살아서 펄떡거렸다. 시인의 격렬한 몸짓과 우렁찬 목소리를 듣는 넛은 또 다른 느낌의, 무서운 감동이었다.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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