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밥

마광수, 실시간 인기검색어 상위인 까닭은?

by 밥이야기 2010. 7. 16.
728x90

 

 

마광수 교수(연세대)가 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가 연극으로 선보이고 있다. 극 중 사라역을 맡은 유니나. 마교수가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의 사라를 정말 마광수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믿음직스런 유니나를 사랑하게 됐다"라고 운을 떼자, 마광수와 유니나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다. 마광수 이름 석자를 떠올릴 때 마다, 1990년대 초 ’즐거운 사라‘로 입건되었던 마교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소설 내용을 떠나, 창작의 내용을 문제 삼아 구속시키는 것은 야만국가에서나 할 일이다. 마광수 교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이후에 쓰여진 소설이 바로 판금 조치된 ’즐거운 사라‘다.

 

마광수. 즐거운 사라를 읽었을 때가 기억나다. 지하철에서 30여분 만에 읽었던 소설은 흔치 않다. 왜냐면 너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읽을 내용이 만화방(어렸을 때)에서 읽었던 삼류애정소설 같았기 때문이다. 기가 막히게 유치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포르노 한 편을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마광수 교수가 ‘즐거운 사라’를 쓰지 않고, 이른바 만화방용 성인소설이나 무협소설을 쓰는 사람이 썼다면, 주목 받을 일 없었을 것이다. 언더그라운드 성인소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강준만 교수는 “처음엔 언어의 천박함에 놀랐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문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문학신성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됐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시대를 앞선 선각자라는 표현까지 썼던 걸로 기억한다. 배설의 기능. 마교수는 자신이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 태어났다면, 입건까지 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아무튼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인 윤동주를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마광수의 도전기는 그 당시 일탈로 보였다. 만약 마교수가 유럽에서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으면 전혀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마교수의 즐거운 사라를 보면서, 피카소를 말한 사람도 있었다. 피카소의 그림을 다른 아마추어가 그렸다면 빛을 볼 수 있었을까? 물론 마교수와 피카소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본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에 마교수가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는 강준만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성함에 도전이라고 보기에는 답답한 현실의 일탈 그 이상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다. 마교수를 비판하고도 싶지 않다. 자유니까. 마교수가 쓴 평론 중에는 돋보이는 글들이 있다. 하지만 ‘즐거운 사라’는 즐겁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마교수의 구토가 마광쉬즘을 만들었을 뿐이다. 성에 대한 관심은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다. 금기이자 분출구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막는다고 포르노를 보지 못하는가? 포르노그라피로 먹고 사는 게 언론 아닌가? 스토리 없는 포르노를 자꾸 보면 식상해지듯, 즐거운 사라를 다시 볼 가치가 없는 이유다. ‘즐거운 사라’를 판금했기에 더 유명세를 탄, 즐거운 사라와 마광수. 문제는 권위다. 마치 ‘즐거운 사라’가 도덕성에 치명적인 것처럼 몰고 간 주류사회의 인식이 더 큰 문제다. 즐거운 사람보다 더 쟁쟁한 언더그라운드 소설이 얼마나 많았는가? 억압하면 할수록, 부조리가 판을 친다는 것을 위정자들은 잘 모르고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는 걸.

 

마광수와 유니나가 실시간 검색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는 연극보다 유니나의 선정적인 사진 아닐까? 인터넷에서 ‘성(性)’이 난곡불락의 ‘성(城’)인 이유다. 그렇다면 성을 억압할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과 성교육을 통해서 스스로 성에 대한 자아와 윤리관을 정립해 가도록 유인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다고 공창제를 도입하거나 성매매를 자유화 시키는 것은 분명 반대한다. 성산업은 범죄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창작의 ‘성’과, 비합법적 성산업은 문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성 해방적 관점과 성을 위한 성 산업을 기준 없이 섞어 억압시키는 것 보다구분 시켜 볼 수 있도록 일상적 교육이 필요하다. 폐쇄성이야말로 음지를 음지로 키워 각 종 성범죄를 야기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마광수라는 키워드를 통해 성에 대한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마광수의 1990년대식 즐거운 사라는 그런 의미에서 억압과 권위의 배설로써 성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평가 받을 만하다. 이제 다들 야한 남자, 여자가 되고, 즐거운 사라가 된 요즘, 문학 작품으로 즐거운 사라는 기능을 다했다.

 


   



                공감하시면 아래 손가락 모양 클릭 - 더 많은 사람들과 관련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