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스티커 칼럼·3) “변명과 변신”
박원순의 '야만시대의 기록', 어찌 잊겠는가?
눈을 떴다. 새벽이다. 잠시 눈을 감고 뜨기를 반복했다. 눈 운동도 아니며, 잠을 깨우려는 뜻도 아니다. 눈감아 환상에 젖어 있으면 좋을 것이다. 나를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이 깨자마자, 일어나서 습관처럼 책을 들거나, 종이노트를 펼치지 않고, 인터넷 노트를 켰다. 생각(정신)의 안과 밖에 따라, 인식과 감정에 따라 인터넷 파도를 탔다. “변명과 변신”. 변명은 참이냐 거짓에 달려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이야기하지 말자. 한국 국민들은 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더불어 최순실과 사람들은 변명하고 있다. 이제 변명을 넘어서 변신하고 있다. 거짓으로 둔갑하고 있다. 독일 출신의 언어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글들이 떠올랐다. 좌파 지식인이라도 평가하지 말자. 발터 벤야민은 이런 말을 남겼다. “ 모든 문명의 기록은 또한 야만의 기록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과거 집필했던 <야만시대의 기록>이 떠오른다. 역사의 기록은 사라질 수 없다. 책을 불태웠다 한들 정신의 기록은 남아있다. 한국은 여전히 야만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일까? 착한 사람, 양심으로 사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변명과 변신, 부패와 왜곡, 사이비 언론과 종교...야만의 시대는 쉽게 사라지고 있지 않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세일즈맨이 왜 갑자기 벌레가 되었을까?
책 속에도 하루살이 벌레도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변명과 변신의 정신은 살아있다. 정신의 벌레들, 결국 새로운 모습으로 권력이 등장한다. 개인주의 선포한다고 말하지만, 개인주의는 오래 전부터 살아있었다. 변명과 변신은 수사학으로부터 돌이켜 생각해 볼 수 도 있다. 그리스 아고라 광장에서 신화로 남아있지만 역사의 뿌리에 살아있다. 과거의 야만시대와 또 다른 모습으로 야만시대가 열린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누가 저항해야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누가 삶의 질을 양으로 채워, 소비시대로 유도하고 있다. 의식주의 모순. 겉의 옷으로 포장된 사람들의 속내를 쉽게 포이지 않는다. 왜 이리 불평등은 심화되면서 과거보다 좋지 않은 과거로, 우리는 소수의 권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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