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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밥

청소년시절 점심 못 먹는 고통은 죽음과 흡사

by 밥이야기 2009.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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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맹이도 소화시키는 청소년 시절


 



점심을 굶는다. 먼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전국의 학교 마다 급식비를 내지 못해 굶는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06년에 비해 2008년 기준 10배가 넘는 아이들(17만명이 넘는)이 급식비를 내지 못했다. 현재기준이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았을 것 같다.


 
풍요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한쪽에만 부가 넘쳐나고, 다른 한 쪽에는 굶는 아이들이 넘쳐나는 사회가 풍요로운 사회인가? 풍요로 가장된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풍요롭되 정의로운 사회는 사회적 약자가 배려 받는 사회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경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씀씀이는 커지고, 가계 빚은 늘어나고 있다. 돌맹이도 소화시킬 수 있는 혈기왕성한 청소년 시절. 끼니를 굶는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가. 몇 십 조의 혈세가 펑펑 헛것에 쓰이는 동안 아이들은 점심은 둘째 치고 돌맹이도 찾을 수 없다. 아스팔트 공화국에 흙 보기가 쉽겠는가. 과연 이런 일들을 누가 책임져야 하나.


소설가 김훈은 ‘책임질 수 없는 책임’이라는 글을 통해 이야기 한다. 가슴을 저미게 하는 글이다. “ 돌멩이라도 소화시켜내는 청소년 시절에 점심을 못 먹는 고통은 죽음과 흡사할 것이다. 배가 고프면 청운의 꿈이고 ‘Boys, be Ambitious'고 뭐고가 없는 것이다. 성립되지가 않는다. 배가 고파서 눈앞이 노란 아이들을 붙잡고 무슨 교육이 가능할 것인가. 이런 아이들이 학교마다 늘어나고 있다. 이런 아이들이 갑자기 무더기로 점심을 굶고 곯아야 하는 사태가 과연 누구의 책임이냐! (중략) 배가 고파서 쩔쩔매는 아이들 앞에서 이 사회는 도데체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져봐야 목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못하고, 책임지워지지 않는 굶주림은 계속 될 터이다. ”

 

김훈은 책임의 소재를 따지는 고담준론의 명성한 이론보다 구세군 냄비에 천원을 넣은 것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글을 끝맺는다. 그렇지만 나는 천원을 넣고 싶지 않다. 천원을 넣는 기부행위는 아름답지만 책임은 끝까지 따져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원의 기부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자활이나 사회적 약자의 무상지원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한다. 돈만 지원하면 망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른바 ‘고기론’이다.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자는 뜻이다. 좋은 말이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굶는 것을 외면하면서 사회적 기업이나 ‘고기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다. 굶어 본 사람들이 굶은 사람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운찬 총리 내정자도 어렸을 때 가정이 힘들었으니 굶어 보았을 것이다. 소설가 이외수는 경우가 다르지만 너무 배가 고팠던 시절, 얼어붙은 찬밥을 깨어서 먹었다고 한다. 여름철이 아니라 칼바람 가슴에 꽂히는 겨울철이었으니 얼마나 몸이 후들거렸을까.

 
정부는 하루 빨리 2009년 기준으로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현황부터 파악해서, 굶는 아이들이 없게 해야 한다. 청와대나 정부 부처 운영비 예산만 줄여도 된다. 아니면 4대강 살리기 예산 일부만 있어도 가능하다. 급한 불을 끄고 나서 그 다음에는 보다 넓게 깊게 급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청계재단을 만든 배경을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배고프면 공부고 무엇이고 가능하겠는가? 헝그리 정신을 강요하지 말자.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이 굶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만들어 보자. 정부가 발 벗고 나선다면 시민들도 십시일반 도울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