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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밥

6.10 민주항쟁 때는 휴대폰이 없었다

by 밥이야기 2011.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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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 24년 전 독재타도 민주쟁취, 호헌 철폐를 외치며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때는 봄 기운 가득했지만, 요즘 6월 10일은 여름이다. 격세지감일까? 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요즘 흔해빠진 휴대폰도 없었다. 4대 매체(신문,방송,라디오,잡지)를 통해 세상 소식을 들었다. 공중전화기앞에서 줄어서서 기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였다. 만약 그당시 인터넷과 휴대폰,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도입되어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 무엇이 사람들을 삼삼오오 모이게 했고, 체류탄에 맞서 싸우게 만들었던 걸까? 목마름과 기다림. 한 번 시위 대열에 나서면 하루가 쉽게 갔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거리로 나섰다. 마음이 '통'했다.



6.10 항쟁을 떠올릴 때면, 박 종철 고문 치사사건과 시위 도중 체류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을 먼저 떠올리지만, 넥타이부대를 잊을 수 없다. 점심 시간 때나 퇴근 후, 심지어 휴가를 내고 시위 대열에 앞장섰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체육관 선거(간접선거)가 아니라 직접 대통령선거와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6.29 선언을 이끌어 내었지만, 6.10 민주항쟁은 미완의 시민혁명이었다. 세월은 흘러, 민주정부(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 넥타이부대들은 기분이 어땠을까? 이어 참여정부(노무현정부)까지. 미완의 민주주의는 부족하나마 합법적인 정부 탄생을 통해 실현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루기도 힘들지만, 무너지기도 쉽다는 것을 이명박 정부들어 확인했다. 


이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참여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했고 짓밟았다. 민주를 이야기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 김영삼으로 이어지는 반공자유민주주의에 천착했다. 언론 자유는24년 전후 전두환정권 시절 수준으로 떨어졌고,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는 무너졌고, 결과 지상주의가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부활시켜 냈다. 소통과 대화가 아니라, 무조건 하면된다라는 70년대 경영관이 국가경영에 주입되었다. 진중권은 오늘 자신의 트위터에 " 6.10 항쟁으로 얻은 권리, MB에게 다시 빼앗겼습니다. 조폭 정권이 빼앗아간 권리, 6.10기념일에 다시 되찾읍시다 "라고 글을 남겼다. 어찌 쉽게 되찾겠는가. 너무 쉽게 믿어 투표한(이명박 정부 탄생) 현실을 방관한 우리들의 책임은 없는지 다시 살펴 볼 일이다.




휴대폰이 없고 인터넷과 트위터가 없었지만 6.10 항쟁은 타올랐다. 저마다 소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행동없는 소통은 소통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제 결국 미완의 민주주의 쟁취는 다시 투표를 통해 이루어 내야 한다. 그 길을 열기 위해서, 삼삼오오 모여 24년 전 그날을 이야기하고, 87체제 이후의 체제를 만들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오늘은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촛불시위가 이어질 예정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을 마음으로 느껴나가자, 휴대폰이 아니라 트위터가 아니라 마음으로 거리를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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