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4월 2일) 후배와 함께 강화도를 갔습니다. 예전에 탁 트인 김포 벌판은 삽질 중이었습니다. 군데군데 아파트 공사를 위해 파헤쳐진 벌판과 어지럽게 도로변에 펼쳐진 공사 안내판을 보니, 기분전환이 아니라 마음마저 혼잡해졌습니다.
버트런드 러셀 경이 쓴 ‘ 게으름을 위한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속도지상주의 사회에서 ‘게으름’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일상을 빠져나와 한가롭게 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여가 시간이 없다면 과연 제대로 산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산업사회에서 사람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게으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정녕 비판받고 죄를 물어야 할 곳은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제도가 아닐까요? 과잉노동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여가 없는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절망하지 말까요?
노동의 소외와 무차별적으로 계속 지어지고 있는 아파트. 콘크리트 아파트는 계속 지어지고 있는데 집 없는 사람들은 지상에 방 한 칸을 마련하기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산업재해로 숨져가고 있는 현실. 벌판을 가로질러 냅다 달리는 자동차로 인해 숨져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성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강화도에서 잔잔하게 출렁이며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있는 순간, 고 박지연 씨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었지요. 꽃다운 나이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박지연. 그녀를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필자의 마음에 잠시 일렁이다 찬 바다 바람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성장은 결국,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국가나 정부가 주장하는 성장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자연 파괴를 위한 성장, 하드웨어 기업을 위한 성장. 성장의 그늘을 너무나 많이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성장이 아니라 성숙의 시대로 나아가야 하는데, 한국 사회는 후퇴되고 있습니다. 국민 소득이 높아진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기치고 남 속여 돈 벌어 성장한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사생아들의 성장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만 존재하는 한국 사회. 그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지연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분노하지 않는 삶은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사회적 죽음을 모른 척 한다면, 결국 그 짐은 누구에게 돌아오겠습니까? ‘제 2의 박지연’은 자신이 낼 수 도 있지 않을까요. 이제 삼성을 말한다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성장에 대해서 말할 때입니다. 성장의 다른 가치를 찾을 때가 아닐지.... 서울로 돌아오는 길, 꽉 막힌 차들을 보며 계속 기다려야 합니까? 게으름이 주는 안식을 날려 보내야 하는지...........
박지연 잘가소서... 당신이 떠난 영혼 없는 사회에서
*이미지출처: 프레시안 이상엽
'사회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우룡 미국줄행랑, 한 시민의 휴대폰에 찰칵 걸렸다 (0) | 2010.04.05 |
---|---|
4.3항쟁, 제주 다랑쉬마을을 찾아서 (1) | 2010.04.03 |
서울대 채상원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3) | 2010.03.31 |
지율 스님 사진전, ‘지금 낙동강은?’ (1) | 2010.03.31 |
천안함 유가족,신경민 클로징 멘트를 떠올린 이유 (0) | 2010.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