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책을 죽이는가』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작가 ‘사노 신이치’의 책이다. 디지털시대가 확장되면서 오프라인 책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소통”이란 말은 무성한데 소통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다시대”엔 소통이 잘 될까? 역사를 살펴보면 책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금서를 통해 죽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80년대 베스트셀러였다. 숀 코네리를 주연으로 한 영화도 화제를 모았다. 책과 죽음을 축으로 한 또 다른 영화가 있다. 책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를 꼽으라면 조니뎁이 출연한 <시크릿 윈도우>와 <나인 게이트>이다. 책을 쓰기 위해, 또 책을 구하기 위해 살인이 이어지는 내용이다. 최근 영화로는 <도서관 전쟁>이 있다. 이 영화는 미래판 미디어 검열과 분서갱유를 그렸다. 『책도둑』도 빼놓을 수 없다. 나치시대의 분서갱유이다.
절대권력을 손에 넣으려던 인물들은 한결같이 책을 소멸시키려 했다. ‘책’의 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소설과 영화에서 ‘책’은 보이지 않는 힘의 상징이고, 권력과 지위의 매개체이다. 책을 없앰으로써 또 책을 손에 넣음으로써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 사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소설이 현실인 것 같고, 현실이 소설 같을 때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진 이미지에서도 나타난다. 사진도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사진(이미지)에 대한 탁월한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말을 떠올려본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사진을 누구에게나 노출되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책에서시작된 소통매체는 20세기 미디어로 이어지면서 이제 온오프라인을 넘나들게 되었다. “책의 미래”, “정보의 미래”, “지식의 미래”, “미디어의 미래” 등 “미래”라는 키워드를 분야별로 검색해보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콘텐츠를 만난다. 디지털시대의 신기술 덕분이다. 인터넷 세상이 펼쳐지면서 구글은 디지털 도서관(자료 뱅크)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시켰다. 아마존닷컴을 통해 전자책 매출도 급성장했다.
한국은 어떠한가? 콘텐츠는 빈약하고 말만 넘쳐난다. 혹자는 한국이 정보 사회를 이끈다고 말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모방을 잘하다보니 경제강국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수많은 발언과 주장, 댓글이 넘쳐난다. 소통과 참여의 장이 열렸고, 모바일을 통한 소통이 극대화되었다.
반면에 악성댓글과 왜곡된 거짓 글들도 부지기수이다. 이것은 소통이라기 보다 새로운 흉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상처를 준다. 축약된 단어를 나열하다보니 오해와 편견도 심화된다. 인터넷 중독증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한 둘이 아니다.
이렇듯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날로 증가하지만 그에 따른 치유책도 마련되어야 한다. 예컨대 집중력이 약해지면 이른 바 디지털치매에 걸리게 된다. 『‘디지털 치매』 라는 책의 저자이면서 정신병학 박사인 만프레드 슈피처Manfred Spitzer는 ”디지털 미디어는 우리들 실제로 뚱뚱하게, 어리석게 공격적으로 , 외롭게, 아프게 그리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또 다른 디지털 증후군. 일부 누리꾼들은 인터넷 공간을 오가면서 한 사람을 매장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전하고, 사생활을 폭로함으로써 정신적 죽음까지 몰고 간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직접 검색해보라. 별의 별 통계와 조사 분석, 관련 책들, 언론기사가 쌓여있다. 따라서 변화에 적절한 대응책과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말의 홍수에서 말을 담기란 힘들다. 소설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대사가 생각난다.
“Water,water everywhere but not a drop to drink ?(여기도 물 저기도 물, 온통 물이지만 마실 물은 없다.) ” (원래 고대 뱃사람의 노랫말에 등장한 가사로, 그 이후 여러 장르의 사람들이 많이 인용했다.)
이처럼 정보의 홍수시대. 바닷물처럼 말은 넘쳐나지만 정작 말다운 말은 없다. 더구나 빅데이터 시대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정보의 바다에 익사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큐레이터가 되어야 한다. 스마트폰 시대이니 누구나 맘만 먹으면 참여할 수 있다. 참여할 생각이 없다면 스스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능력을 길러야 한다. 소통을 빙자한 언어로 진짜 소통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직간접적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반대 의견은 늘 존재하는 jq이다. 특정 정치인을 공격하기 위해 그 사람 이름 석자로 말장난을 한다. 하룻 만에 멀쩡한 사람이 바보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철수와 영희’ 이야기가 아니다. 철수를 철수撤收하게 하는 것이 정상인가? 언어의 배신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정으로 자극을 주는 미디어는 정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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