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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밥

올해의 아름다운 인물, 김예슬과 김은총

by 밥이야기 201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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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연말연시 한 해를 갈무리하면서 많은 시상식이 거행 된다. 한 해의 노고를 격려하고 새해에도 변함없이 일해 달라는 당부와 지지의 자리이기도 하다. 한 해 일어난 소식들을 기억의 서랍에서 꺼내어 정리하다, 두 학생의 글과 만났다. 바로 김예슬과 김은총 학생이다. 김예슬은 고려대를 그만 두면서 글을 남겼고, 김은총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마련한 인권 에세이상 고등학생 부문 대상 수상을 거부하며 글을 남겼다. 글 속에 담긴 내용은 많은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소신. 굳게 믿고, 생각한 바를 실천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김예슬과 김은총은 소신 있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실천했다. 아름다운 일이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굴도 아름답고, 만남도 아름답고, 사랑도 아름답고, 삶도 아름답고.. 이제는 너무 흔해져 버린 ‘아름다움’ 이라는 말. 원래 ‘아름’은 한아름, 아름드리처럼 ‘양팔을 벌려 껴안은 둘레’를 뜻헸다고 한다. 옛날에는 ‘아름’이 ‘나’를 뜻하는 ‘아람’이라는 말로 쓰였다. 아름에 다움이 더해진 아름다움이란 내 몸에 넉넉하게 들어오는 풍요로움, 다른 것들을 나스럽게 여기는 것, 이런 뜻이 아닐까 싶다. 두 사람은 자신을 넘어 현실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껴앉았다. 그렇기에 더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진정으로 아름다운 아름다움이란 내 이웃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나처럼 소중히 여기며 두 팔을 벌려 다른 사람을 한아름 껴안은 것 아닐까?   김예슬과 김은총 학생이 쓴 글은 그 어떤 지식인이 쓴 글보다 솔직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이 자기 성찰과 반성을 글을 많이 썼을까? 김예슬은 대학을, 김은총 학생은 상을 거부했지만, 두 사람의 소신있는 언행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상을 드리고 싶다.마음으로 나마 <올해의 아름다운 인물>로 선정해 드리고 싶다.


김예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 이미지출처/경향신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건 잊은 지 오래여도 좋다.
그런데 이 모두를 포기하고 바쳐 돌아온 결과는 정말 무엇이었는가.
우리들 20대는 끝없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 앞을 가린다.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
많은 말들을 눈물로 삼키며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깊고 크게 숨을 쉰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



김은총

현병철의 국가인권위는 상을 줄 자격이 없다.

 
김은총 (영복여자고등학교 3학년) /2010 인권에세이 공모전 고등부 대상 수상자

 
상을 받는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다. 내가 열심히 쓴 글이 좋게 평가 받아서 대상까지 받게 되었다면, 그건 참 과분할 정도의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상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아있는 현병철 위원장이 주는 상은 별로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몇 달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청소년인권’을 주제로 인권에세이 공모전을 하는 것을 보고 <‘언론’은 있지만, ‘여론’은 없는 학교>라는 제목으로 공모했다. ‘여론’이 없는 학교의 현실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신문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국가인권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하고 마음이 심란해졌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위원들이 사퇴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전문위원들도 사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위원들과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은,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던 와중에 얼마 전 이 인권에세이 공모전에서 내가 쓴 글이 대상을 받는다는 소식을 받았고,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국 이 상을 거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록 나는 고등학생이긴 하지만, 인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왔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수능 공부보다도 인권 공부에 더 열을 올렸고, 인권활동에도 참여해왔다. 어쩌면 현병철 인권위원장보다도 더. 발칙하고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현병철 위원장은 고등학생인 나도 느낄 만한 인권감수성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여러 위원들이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데도, 그 목소리에 한 번도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인권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권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이 박힌 사람이라면 할 수 없을 말들을 서슴없이 하는 것을 보면서, 꽉 막힌 학교, 꽉 막힌 이 사회와 별반 다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과연 나에게, 그리고 다른 나머지 수상자들에게 상을 줄 자격이나 있을까.

인권에세이로 선정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많은 내용들이 ‘언론, 표현의 자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위가 직접 선정한 작품들에서 이야기하는 인권의 ‘반도 못 따라가고 있는’ 인권위의 모습을 제대로 돌아보아야 한다. 인권위원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현병철 위원장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온 것에 대해 책임지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내가 에세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인권’을 지금 현병철이라는 사람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끝도 없이 밑바닥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인권을 보장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애를 써야 할 국가인권위가 오히려 인권을 모욕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정말로 지금 상황에 심각성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성찰할 의지가 생긴다면, 감히 인권에세이 수상자인 청소년들에게 “참 잘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상 줄게요”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현재의 국가인권위원회를 제대로 된 국가인권위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현병철 위원장이 위원장으로 앉아있는 인권위에서 주는 상은 받고 싶지 않다. 현병철 위원장은 나에게 상을 줄 자격조차 없다. 나는 2010인권에세이 대상 수상을 거부한다. 12월 10일 수상식 당일에 이런 뜻을 밝힐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친구와 같이 태국 여행을 가기로 한 날짜와 겹쳐서 수상식에 참가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수상을 거부한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내 목소리가 보태어져, 내가 한국으로 돌아올 12월 13일 즈음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더 이상 현병철이라는 분이 아니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세월의 잔 때가 묻으면, 소신있는 말과 행동을 하기 보다는, 마냥 소심해진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름을 인정해주데서 시작된다. 틀에 박힌 일상에 안주하기 보다는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두 학생이 올해 던진 발언은 쉽게 잊혀져서는 안된다. 이런 학생들이 많이 나와야한다. 변화는 제도나 기다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현실과 인권상황에 작은 울림을 준 두 학생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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