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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밥

민간인 사찰, 한국사회의 파놉티콘은?

by 밥이야기 2010.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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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들어 감시와 통제, 사찰이라는 단어가 새삼 부상하고 있다. 유신시대인가, 5공시절인가 분간하기 힘들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창한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18세기 말 유럽을 여행하면서, 현대 감옥의 모델이 된 ‘파놉티콘(Panopticon)’을 설계한다. 파놉티콘은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공리주의자 벤담은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해서 파놉티콘을 현실화(프랑스정부에 제안)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파놉티콘은 적은 비용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고자 했던 기획이 감옥으로 확장된 개념이자 디자인이다. 일망감시장치. 근대사회의 정치를 규율과 훈련권력으로 해명했던 프랑스 철학자 미셀푸코의 대표작 ‘감시와 처벌’도 파놉티콘의 재해석인 셈이다. 푸코는 파놉티콘을 통해, 권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것이며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집결된 권력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감시하고 통제하는 파놉티콘의 개념은 감옥, 군대, 조직, 학교, 병원 등 여러 시설에 녹아들어가 있다.

 

푸코가 말한 규율과 훈련의 권력은 적나라한 폭력을 동반한 억압적 권력이 아니다. 신체나 감정을 자발적으로 억제하게 만드는, 얌전하지만 의심 많은 권력이다. 또한 위에서 아래로 이동되고 억압되며 금지되는 권력이 아니라, 모세관처럼 펼쳐져서 일상적 사회실천을 통해 작용되는 권력을 뜻한다.

 

인터넷과 휴대폰. 전자시대에서 감시와 통제 기능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찰이 이루어지려면 감시체제가 있어야 한다. 1970년대 일본에서 ‘관리사회’라는 말이 유행했다. 관리사회는 지배자 계급이 소유한 실물적 권력에 의한 억압이라기보다는 사회에 만연하지만 작용이 부드러운 억압, 그렇지만 딱히 그 원천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억압감을 표출한 용어다.

 

민간인 사찰 사건을 지켜보면서, 파놉티콘과 관리사회라는 말이 떠오른 이유다. 일정한 감시체제가 있지는 않지만, 사회에 만연된 억압감. 감시와 사찰, 통제. 이명박 정부는 촛불시위 이후, 반성이 아니라 시위가 일어난 근원적 배경과 사전 통제 기능을 확대 부활시켰다. 딱히 감시와 사찰체제를 만들지 않았지만, 국가 조직과 권력의 종사자들이 움직였던 것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결국 국무총리실 공직지원윤리관실도 이명박 정부의 관리사회가 부활한 셈. 민주당에 의해 민간인 사찰의 다른 사례가 나오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련 물품을 팔았다고, 정부부처로부터 압수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일관된 사찰방침을 하달했는지 알 수 없다. 사찰리스트가 없었다고 했어도, 어쨌든 이명박 정부의 관리들은 눈치로 권력의 흐름에 따라 감시망을 가동시킨 셈이다.

 

박원순 변호사는 국정원이 민간인과 시민단체를 사찰하고 있다고 발언하자, 국가의 이름으로 명예훼손죄로 물었다. 삽질공화국 전시 작품에 국정원 직원이 압력을 가하고, 조계사 마당에서 개최되기로 했던 집회가 국정원 직원의 개입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사찰에서 통제까지. 근대적 의미의 파놉티콘은 여러 시설에 적용되어있다. 이제 인터넷과 휴대폰 등 전자통신을 감시하는 파놉티콘이 등장한 셈이다. 이명박 정부는 정말 사찰공화국인가? 이제 이 물음과 의심에 답하고 밝혀야 할 차례다. 몸통 없는 감시와 사찰의 주체를 찾아서.....

 

 

                      중앙감시탑에서는 수형자를 완벽히 볼 수 있지만, 감시탑의 인물은 수형자가 볼 수 없다.
                     이렇게 얼굴 없는 감시의 눈길은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들어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강제한다.

* 참고 및 인용서적: 감시와 처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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