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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밥

이외수,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너무 부끄럽다"

by 밥이야기 2011.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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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맞아 죽은 세 살 짜리 아기. 굶주림을 죽음으로 마무리한 삼십 대의 시나리오 작가. 아직도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럽다"(이외수). 자신의 아들이 아닌 것 같다며, 세 살 배기 아기를 죽여 버린 아버지. 아기의 몸에는 아버지에게 맞은 멍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언론은 전했다. 가출 한 뒤, 홀연 아이를 안고 다시 찾아온 아내. 남의 자식이건 아니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인가. 더 많은 사연이 있겠지만, 아이를 죽인 아버지의 변명은 변명이 아니라 광기다.


방 안에 먹다 남은 빵 반 조각과 라면 4개를 남기고 숨진 최고은 작가. 
창피하지만, 남는 김치와 밥이 있으면 자신의 방문을 두드려 달라는 고인의 쪽지는 유서 아닌 유서가 되었다. 
이유를 묻기 전에 너무 슬픈 현실이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 소식은 한겨레신문 보도가 있었기에 세상 문을 삐집고 나왔지만, 
생계형 자살이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말 못할 사연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가난은 창작의 원천일까? 
물론 가난을 경험해 본 사람이 그 속내를 잘 알기에 문학이라는 그릇에 조미료를 칠 수 있겠지만, 
가난은 일반적 잣대일 뿐이다. 어떤 이에게는 창작의 원천이 될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현실과 쉽게 타협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어제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공지영은 "가난은 예술의 동력"이라고 말했다.
맞으면서도 틀린 말이다.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말은 아니다.
공지영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작가가 되지 않고 가난한 작가 생활을 이어갔다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올까?


이외수씨도 한 때 지독한 가난을 체험한 작가다.
물론 그런 분들이 한, 두명이 아니지만...
이외수씨는 얼음밥을 송곳으로 깨어 먹은 사람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세대 차이가 분명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현실을 개척하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연약하고 소심한 성격의 사람들도 있다.
밀린 원고료를 받기 위해, 전화를 몇 번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는 사람도 있는가 반면에
원고료를 칼 같이 챙기는 황석영 작가 같은 사람도 있다.
경험 때문이다. 의당 누구보다 더 챙겨 주어야 할 작가들의 원고료는 오른 물가에 비해
턱없이 작다. 작가를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황석영도 원고료를 많이 떼여 먹어 원고료를 잘 챙기는 것 아닐까?


이렇듯, 예술가들이 가난을 받아 들이거나
주어진 환경과 시대상, 나이,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 일 수 있다.
패자부활전이 사라지고
승자강육의 시대가 이어진다면
제 2의 최고은이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성찰의 시대. 남의 불행을 같이 아파하고, 보듬어 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부끄러워 할 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 지금보다 조금 더 사람 사는 세상이 열리지 않겠는가?


최고은 죽음 소식을 전해 들은 최병국 문체부장관이
" 선진국 대열에 있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선진국 대열 운운하기 전에 치솟는 물가
벌어지는 소득격차, 4대강 사업을 먼저 떠올리기 바란다.
선진국 대열에 서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이명박 정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민 삶의 질과 행복지수는 후진국 대열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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