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밥

박형규 목사, 역사의 산증인 실천하는 신앙인 별세

by 밥이야기 2016. 8. 19.
728x90

 

 

박형규 목사가 별세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의 산증인. 박형규 목사가 어제(18) 오후 530분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불리며 평생을 빈민·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박형규 목사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남북평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6차례의 옥고를 치르는 등 고난의 길을 걸었던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의 인물 중에 인물이다. 박 목사는 19594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공덕교회 부목사로 부임하며 목회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평범한 목회자였던 박 목사를 교회 밖으로 끌어낸 계기는 19604·19 혁명이었다. 당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총소리와 함께 피 흘리는 학생들을 목격한 박 목사는 충격에 휩싸였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박 목사는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에서 "들것에 실린 학생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무언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박 목사는 당시 기독교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플래카드와 전단을 배포하려다 실패한 뒤 '내란예비음모죄'로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이어 19782월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새 민주헌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3.1 민주선언'을 발표했다가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무려 6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의 맨 앞자리에는 박 목사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서도 박 목사의 투쟁은 계속됐다. 전두환 정권은 폭력배를 동원해 그가 목회하던 서울제일교회에서 난동을 부리게 하는 등 박 목사를 탄압했다. 하지만 거리로 내몰린 박 목사와 교인들은 무려 6년 동안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노상 예배'를 이어갔다. 이 사건은 독일의 시사 주간지가 보도하면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한편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박 목사는 지난 2014년 법원의 재심 결과 무죄를 선고받으며 35년 만에 억울함을 벗었다. 저서로는 '해방의 길목에서', '해방을 향한 순례', '파수꾼의 함성', '행동하는 신학 실천하는 신앙인',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등이 있다. 박 목사는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로 지난 2010년 만해문학상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