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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밥

윤복희,미니스커트가 아니라 아이돌 1호였다?

by 밥이야기 2011.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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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희가 MBC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다. 윤복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세대마다 다를 것이다. 대한민국 미니스커트 1호, 미친 가창력 등 그녀가 수놓았던 시대의 아이콘들. 요즘 젊은 세대나 아이돌 가수는 잘 모를 수 있다. 윤복희는 해방둥이 세대다. 해방둥이(1945년생) 더하기 1인 1946에 태어났다. 윤복희가 살았던 시공간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한 복판. 한길사에서 79년에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그당시 많은 학생들에게 인식의 지평을 열어 준 사회과학서적이었다. 우리에게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왜 중요할까? 윤복희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인식할 수 있을까?


역사는 책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윤복희는 가수 데뷔 60년차다. 6살 때 데뷔. 한국 대중현대음악사의 1세대인 셈. 윤복희는 어머니를일찍 여의고,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음악을 익혔고 노래를 불렀다. 이어 아버지도 별세한다. 10살 나이 전후로 부모님을 잃었다. 남은 것은 오빠(윤향기)뿐. 그녀는 생존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오빠의 공부를 위해 돈을 벌었다. 요즘의 아이돌처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아이돌 가수를 자임했다. 물론 선천적인 재능도 한몫 거들었을 거이다. 배운게 도둑질이 아니라, 음악과 노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윤복희는 가창력을 인정받아, 재즈의 선구자(황제)로 불리는 루이 암스토롱이 국내에 내한할 때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다. 그 이후 윤복희의 미국 공연 때 루이 암스트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딸처럼 그의 재능을 아꼈고 힘이되었다고 한다. 윤복희는 영국의 BBC 투나잇에도 출연(비틀즈 데뷔 시절)하게 되고, 한국 가수의 해외 진출 가능성을 마련한 마중물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독일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을 받을 정도였으니... 두 차례의 결혼과 이혼. 특히 남진과의 결혼과 이혼은 그 당시 빅연예뉴스였다. 세월은 흘러 그녀의 이름은 시나브로 잊혀졌다. 왜냐면 윤복희는 이른바 묻지만 회고 공연(옛 가수의 연도별 기념 공연)을 갖지 않았다. 60주년 기념 공연은 처음인 셈.


* 이미지출처>> http://blog.paran.com/benjamin/13035766



윤복희는 한 때(1996년) 한 기업(신세계)의 PR CF에 등장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미니스커트 1호. 동영상 광고에 등장한 인물은 윤복희가 아니었다. 무릎팍 도사에서도 재삼 언급했듯, 귀국 당시는 겨울이라 코트에 장화를 신고 있었고 추워서 미니스커트를 입을 수 없었기 때문. 물론 신문광고의 사진은 윤복희가 제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광고는 그 당시 대중들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광고의 컨셉은 '최초'와 '도전'이었다. 윤복희에 이어 서태지도 나왔다. 다른 사람은 '미쳤군'이라 외쳐도, 금기와 편견의 벽을 넘어 자신의 세계를 일군 인물들을 조명하고자 했다. 광고는 광고일뿐. 그래도 그때 그 광고를 통해 윤복희를 모르는 세대들에게 '윤복희' 이른 석자를 기억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러분들은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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