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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밥

다큐멘터리3일,하늘 길을 따라 걸은 이유

by 밥이야기 2009.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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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다큐멘터리의 사회

 


  ▲아려한 기억들, 계단들...(사진출처: KBS 다큐멘터리 3일>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고나면 생각의 지평이 넓어진다. 지난 주 ‘다큐멘터리 3일(KBS1/토요일 21시40분)’에 소개된 <하늘 길을 걷다 - 3일간의 산복도로 순례>.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3일간의 순례는 지난 추억을 따라 하늘 길을 걷게 만들었다. 반세기가 지난 산복도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옹기종기 얽혀 있는 집들의 색상만 바뀌었을 뿐. 집과 골목길 바닥의 콘크리트는 구멍이 나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세월의 풍파를 이겨왔다.

 
하늘이 닿을 것 같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렸을 때 가댁질하며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던 친구들 모습들이 밀려온다. 부산의 산복도로는 한국현대사의 상징적인 공간 중에 하나다. 전쟁의 포화에 떠밀려 생활고에 떠밀려 산에 하나, 둘 머리를 맞대면서 살림을 꾸려 나갔던 사람들. 부산 산복도로에는 아직 78개동 6곳의 산복도로에 백만 명이 꿈을 이어 나가고 있다. 산복도로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다른 길을 찾아 떠났다. 이곳 산복도로에는 이제 나이든 어른들이 바다가 보이는 창 넘어 불어오는 추억을 떠올리며 밥을 먹고 있다. 밥을 위해 모였고, 밥을 위해 떠난 사람들. 모든 것들이 밥에 대한 기억이다. 다 먹고 살자고 모였고, 먹고 살기 위해 여기를 떠났다.




▲'다큐멘터리 3일' 하늘 길을 걷다. 부산 산복도로 (이미지출처: KBS '다큐멘터리 3일)

 
사람들은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는 기억 속에 파묻힌 공간과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소통의 매개체다. 장면들은 때로 상처들을 드러내고, 복원해 준다. 도시 촌놈이라는 말을 가끔 할 때가 있다. 도시 출신도 변방이 있다. 땅값 비싼 도시의 주택 넘어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산꼭대기 집. 부산뿐만 아니다. 서울도 그렇고 대도시를 이루는 곳에는 산복도로가 있다. 이제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하늘 아래 많은 집들이 지워졌다.

 

‘다큐멘터리 3일’은 3일을 담은 영상스케치지만, 사람들이 산복도로에 살았건 살지 않았건 간에 산복도로라는 풍경을 통해 삭막해져 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매만져줄 수 있다. 죽은 감성을 살려 내는 다큐멘터리는 사람의 정신을 살찌운다. 어쩔 때는 수 십 권의 책을 읽는 것 보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 한 편이 낫다.

 

산복도로에는 아직 구멍가게가 있으면 골목길들이 있다. 크고 작은 오색찬란한 빨래들이 태양과 바람을 쐬며 하루를 말리는 풍경들이 있으며, 골목길 언저리 언저리마다 노인들이 나와 끝없는 기다림 속에 하루를 보낸다. 옥상과 옥상을 건너다니는 하늘고양이. 밤마다 쏟아지는 기침소리와 창문 닫는 소리. 밤에 소리 소문 없이 모였다가 새벽이며 또 어디론가 밀려가는 사람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처럼 KBS 가을 개편에 따라 ‘30분 다큐’도 폐지되고, ‘다큐멘터리 3일’도 시간대를 새벽언저리로 내보낸다고 한다. ‘인간 극장’도 아침 시간대로 옮아갔으니 이제 제 시간 대에 남은 것은 ‘KBS 스페셜’뿐이다.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오락 ,드라마 일색의 방송프로그램들. 다큐멘터리가 사라지고, 시청률이라는 이름으로 한직 같은 한가한 시간으로 밀려나가는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불행한 일이다.

 

KBS가 본연의 ‘국민의 방송’이 되려면, 다큐멘터리는 더 많이 제작되고 전파를 타야한다. 사람들의 사고를 천편일률적인 방송으로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 국민을 우민화시키는 방송은 죽은 방송이다. 다큐멘터리는 살아있는 교육이다. 더 많아져야 할 것들은 사라지고, 없어져야 할 것들이 꼬리를 쳐드는 ‘죽은 다큐멘터리의 사회’. 다큐멘터리 3일을 보면서, 하늘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한국 다큐멘터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데 기여했던 KBS. 이제 영국 BBC나 일본 NHK의 다큐멘터리만 보아야 하나? BBC를 BBC 답게, NHK를 NHK 답게 만든 것은 바로 다큐멘터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