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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밥

아키노암살이 없었다면, 김대중의 운명은?

by 밥이야기 2009.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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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지난 시절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릅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한국의 만델라라고 말하지만, 1980년대 초에는 한국의 아키노(B.S.Aquino)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만델라와 김대중은 긴 억압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전 세계로 신장시켰다는 의미에서 상징적 닮은꼴이지만, 필리핀의 전 상원의원이었던 아키노는 보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비교 조명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리핀 야당 지도자였던 아키노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역정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아키노는 1977년, F.E.마르코스(Ferdinand Edralin Marcos)의 독재에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1980년 심장병 수술이라는 명목으로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아키노는 미국에서도 활발하게 반 마르크스 운동에 앞장섭니다. 독재자 마르크스에게는 눈에 가시이자 정적 1호였습니다.

 


  ▲비행장에서 사망한 아키노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코란손 아키노(필리핀 전 대통령)


아키노는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을 결심, 1983년 8월 21일 마닐라공항에 도착 하자마자 청부살인자 롤란도 길만에게 암살당합니다. 하지만 갈만 또한 군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피격됨으로써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은 갈만이 단독 범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여 나가시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18년 마르크스 장기 집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필리핀 법원은 4년 뒤에야 갈만의 살해 혐의로 16명의 군인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망명길에 오르지요.

 
김대중 대통령도 1980년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지만 국제사회의 압력과 국내 여론이 거세게 일자, 형집행 정지 선고를 내립니다. 1982년 김대중 대통령은 사선을 넘어 생애 두 번째의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미국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김대중은 조국의 현실이 걱정되어, 1985년 2월 8일 죽음을 무릎 쓰고 귀국하게 됩니다. 미국의 민주당 인사들과 정치학자들은 필리핀의 아키노처럼 또 한 번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 귀국 비행기에 같이 탑승하게 됩니다. 만약 아키노암살이라는 세계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1985년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하기 위해 비행기 오른 김대중 대통령. 미국 민주당 인사와 정치학자인 부르스 커밍스교수가 함깨 탑승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안전 귀국을 바라는카터 대통령의 친서(왼쪽)와 미국 국회의원들의 서명(오른쪽)


오늘 갑자기 아키노의 얼굴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이 겹쳐 떠오릅니다. 아키노의 부인(코라손 아키노)은 남편의 뒤를 이어 정치가로 변신, 반 마르코스 열풍을 일으키며 일부의 군부세력과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됩니다. 만약 아키노의 죽음이 없었고,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김대중 대통령이 귀국길에 올라, 신군부에 의해 암살당했다면. 이희호 여사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남편의 뒤를 이어 민주투사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만약 과거 역사의 경험이 없었다면,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퇴되었을까, 아니면. 독재에 맞서 더 빨리 민주화투쟁이 점화되었을 수 있었다는 가정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만델라를 넘어, 한국의 아키노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와 세계 인권 신장에 큰 기여를 하신 김대중 대통령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이미지 출처: 김대중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