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참 흔하고 쉬운 말인 것 같지만 오늘 따라 이 말이 새롭게 다가섭니다. 사람 이름도 이름 나름이겠지요.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죽은 뒤에 더 조명 하고, 재해석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만큼 현실 세계는 이성적이지 못합니다. 이성을 가장하지만 톱니바퀴의 일상에 걸려 돌아다 볼 틈이 없는 거지요. 죽음이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더 이성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슬픔이 끝나면, 아니 너무 슬퍼하다 보면, 갑자기 사물들이 다시 보이듯, 생각의 지평도 넓어 지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생전에 못해드렸거나 귀담아 듣지 않은 이야기들이 꿈틀 꿈틀 가슴 속을 헤집고 나오니까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살아있을 때와 서거이후 큰 이견 없이 존경을 받는 흔치 않는 인물입니다.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사람들과 이유 없이 미워했던 사람들은 제외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김대중 서거 이후 그럴듯한 말과 행동으로 죽은 자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지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자들이 때로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기 때문입니다. 죽어 산다는 말은 정신과 지향은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이름을 넘어 사상을 남기고 가르침을 던져 주는 사람이 바로 인동초 김대중입니다.
▲노벨상 홈페이지. 김대중 대통령. 출생연도와 서거연도(2009)가 벌써 기록되어 있다.
▲스웨덴 주요 일간지 중에 하나인 나건스 나이터 홈페이지에는 실시간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오늘 스웨덴 노벨상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벌써 서거 년도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문과 군나르 베르게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위원장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수상 배경이나, 햇볕정책(통일관)에 대한 글도 글이지만, 더 빛나고 값진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 그때(2000년)는 이런 글을 보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내용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는 기뻐한 나머지, 미처 보지 못했거나 대충 넘어갔던 것이지요.
김대중 대통령은 알려지다시피 서예에 조예가 깊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에 높게 평가를 주고 싶기도 합니다. 힘이 넘쳐 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예작품에는 ‘경천애인’과 ‘사인여천’이라는 글이 많이 쓰여 졌습니다. 사인여천. 한울님을 공경하듯이 사람도 그와 똑같이 공경하고 존경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의 핵심 사상이자 윤리관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결국 사람에게 화를 당했지만, 그 화를 사랑으로 베푼 인물입니다. 사람을 핵심 가치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높고 낮음이 없는 평등 세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과 그 뜻이 닿아 있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도 사인여천의 정신이 언급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 '사천여인'
제가 민주화를 위해서 수십 년 동안 투쟁할 때 언제나 부딪힌 반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에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으며 그러한 뿌리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아시아에는 오히려 서구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인권사상이 있었고, 민주주의와 상통한 사상의 뿌리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사람이 즉 하늘이다.' '사람 섬기는 것을 하늘 섬기듯 하라.' 이런 것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근 3천 년 전부터 정치의 가장 근본요체로 주장되어온 원리였습니다. 또한 2천 5백 년 전에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내 자신의 인권이 제일 중요하다'는 교리가 강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권사상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상통되는 사상과 제도도 많이 있었습니다. 공자의 후계자인 맹자는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다. 하늘이 백성에게 선정을 펴도록 그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임금이 선정을 하지 않고 백성을 억압한다면 백성은 하늘을 대신해 들고일어나 임금을 쫓아낼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존 로크]가 그의 사회계약론에서 설파한 국민주권사상보다 2천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뛰어 넘는 발언했습니다. 주체적인 사상관이지요. 이런 정신이 햇볕정책에 일관되게 녹아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죽어서 이름만 남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배우고 이어가야 할 보편적인 가치와 지향이 이제 곳곳에서 빛을 발휘 살아날 것입니다.
군나르 베르게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을 축하하는 연설에서 노르웨이 남서부의 항구도시 스타번게르의 작가 군나르 롤드크밤가 쓴 시 "마지막 한 방울"을 소개했습니다.
옛날 옛적에 물 두 방울이 있었다네 하나는 첫 방울이고 다른 것은 마지막 방울 첫 방울은 가장 용감했네 나는 마지막 방울이 되도록 꿈꿀 수 있었네 만사를 뛰어넘어서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되찾는 그 방울이라네 그렇다면 누가 첫 방울이기를 바라겠는가?
그리고 다음과 같이 첫 물방울을 대해 언급하면서 연설을 끝맺습니다.
북한주민들은 오랫동안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그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거나 엄청난 정치적 탄압에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북한 지도자들은 남북한 화해를 향해 첫발을 내딛게 한 역할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냉전의 빙하시대는 끝났습니다. 세계는 햇볕정책이 한반도의 마지막 냉전 잔재를 녹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과정은 시작되었으며 오늘 상을 받는 김대중씨 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분은 없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첫 번째 떨어지는 물방울이 가장 용감하노라".
앞으로 살아 갈 사람들이 두 번째 물방울이 되어 통일 세상을 이루어 내어야 합니다.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문 전문>>전문 읽기(아래 더보기)
<김대중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문>
국왕 폐하,
왕세자와 공주 등 왕실가족 여러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 위원 여러분,
그리고 내외 귀빈과 신사 숙녀 여러분!
노르웨이는 인권과 평화의 성지입니다. 노벨평화상은 세계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격려하는 숭고한 메시지입니다. 저에게 오늘 내려주신 영예에 대해서 다시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수많은 동지들과 국민들을 생각할 때 오늘의 영광은 제가 차지할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바쳐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국민의 민주화와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세계의 모든 나라와 벗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노벨평화상을 저에게 주신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난 6월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과 그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남북 화해협력 과정에 대한 평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노벨 위원회가 긍정적으로 평가해준 최근의 남북관계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6월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북한에 갈 때 여러 가지 걱정이 많았지만 오직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일념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회담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남북은 반세기 동안 분단된 가운데 3년에 걸친 전쟁을 치렀으며 휴전선의 철책을 사이에 놓고 불신과 증오로 50년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남북관계를 평화와 협력의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저는 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북에 의한 적화통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남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도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셋째, 남북은 오로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협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얼마가 걸리더라도 서로 안심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북한은 처음에는 우리의 햇볕정책이 북한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여기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관되고 성의있는 자세와 노르웨이를 비롯한 전세계 모든 나라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는 북한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북정상회담은 예상했던 대로 참으로 힘든 협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민족의 안전과 화해협력을 염원하는 입장에서 결국 상당한 수준의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조국의 통일을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이룩하자, 또 통일을 서두르지 말고 우선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 협력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둘째, 종래 남북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통일방안에 대해서도 상당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북한은 우리가 주장한 통일의 전단계인 [1민족 2체제 2독립정부]의 [남북연합제]에 대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형태로 접근해 왔습니다.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통일에의 제도적 접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셋째, 한반도에 미군이 계속 주둔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데에도 합의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50년 동안 남한에서의 미군철수를 최대 쟁점으로 주장했습니다. 저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강조했습니다. "미․일․중․러의 4강에 둘러싸여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특수한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는 우리로서는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필수 불가결하다. 미군은 현재 뿐 아니라 통일 후에도 필요하다. 유럽을 보라. 당초 [나토]의 창설과 미군의 주둔은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침략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공산권이 멸망한 지금도 [나토]와 미군이 있지 않느냐.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그 존재가 계속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뜻밖에도 종래의 주장을 접고 적극적인 찬성의 뜻을 나타냈는데, 이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참으로 뜻깊은 결단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이산가족이 만나는 데 합의했으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원만하게 실천에 옮겨지고 있습니다. 경제협력에 대해서도 합의를 했습니다. 이미 투자보장, 이중과세방지 등 4개의 협정을 체결하는 합의서에 서명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북한에 대하여 인도적 차원에서 비료 30만톤과 식량 50만톤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문화 교류에 대해서도 합의해 스포츠, 문화예술, 관광의 교류 등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남북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 국방장관회담이 열려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남북간의 분단된 철도와 도로를 다시 연결하기 위해 양쪽 군이 협력하는 데에도 합의했습니다.
한편 저는 남북관계의 개선만으로는 한반도에서 평화와 협력을 완벽하게 성공시킬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나아가 일본과 다른 서방국가들과도 관계를 개선할 것을 적극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 [클린턴] 대통령, [모리] 총리 등 미․일 양국의 정상에게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권고했습니다.
또한 저는 지난 10월에 서울에서 열렸던 제3차 ASEM정상회의에서 유럽의 우방국가들에게도 북한과 관계개선을 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북․미 관계와 유럽․북한 관계는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한반도의 평화에 결정적인 영향과 진전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제가 민주화를 위해서 수십년 동안 투쟁할 때 언제나 부딪힌 반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에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으며 그러한 뿌리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아시아에는 오히려 서구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인권사상이 있었고, 민주주의와 상통한 사상의 뿌리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사람이 즉 하늘이다.' '사람 섬기는 것을 하늘 섬기듯 하라.' 이런 것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근 3천년 전부터 정치의 가장 근본요체로 주장되어온 원리였습니다. 또한 2천 5백년 전에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내 자신의 인권이 제일 중요하다'는 교리가 강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권사상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상통되는 사상과 제도도 많이 있었습니다. 공자의 후계자인 맹자는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다. 하늘이 백성에게 선정을 펴도록 그 아들을 내려보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임금이 선정을 하지 않고 백성을 억압한다면 백성은 하늘을 대신해 들고일어나 임금을 쫓아낼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존 로크]가 그의 사회계약론에서 설파한 국민주권사상보다 2천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이미 기원전에 봉건제도가 타파되고 군현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공무원을 시험에 의해서 뽑는 제도는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해서 임금을 포함한 고관들의 권력남용을 감시하는 강력한 사정제도도 존재했습니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에 대한 풍부한 사상과 제도의 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아시아에서는 대의적 민주제도의 기구는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서구사회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이는 인류의 역사에 크게 기여한 훌륭한 업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서구의 민주제도는 민주적 뿌리가 있는 아시아에서 이를 채택할 때 아시아에서도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일본․필리핀․인도네시아․태국․인도․방글라데시․네팔․스리랑카 등 수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동티모르에서 주민들이 민병대의 혹독한 학살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독립을 지지하는 투표에 참가했습니다. 지금 미얀마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가 고난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미얀마 국민과 민심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미얀마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회복되고 국민에 의한 대의정치가 다시 부활하는 날이 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절대적인 가치인 동시에 경제발전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 올바른 시장경제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시장경제가 없으면 경쟁력 있는 경제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민주주의적 기반이 없는 국가경제는 사상누각일 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98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과 함께 [생산적 복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2년반 동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생산적 복지의 병행 실천이라는 국정철학 아래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적극 보장하고 있습니다. 금융․기업․공공․노동 부문의 4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복지의 중점을 저소득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인력개발에 둠으로써 이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개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을 조속히 마무리함으로써 전통산업과 정보산업, 생물산업을 삼위일체로 발전시켜 세계 일류경제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지식 정보화시대로서 부가 급속히 성장하는 시대입니다. 동시에 정보화시대는 부의 편차가 심화되어 빈부격차가 급격히 확대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빈부격차도 커져 갑니다. 이것은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심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21세기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인권의 탄압과 무력의 사용을 적극 반대해야 합니다. 아울러 정보화에서 오는 새로운 현상인 소외계층과 개발도상국의 정보화격차를 해소함으로써 인권과 평화를 저해하는 장애요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존경하는 국왕 폐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 개인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릴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에 다섯 번에 걸쳐서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 6년의 감옥살이를 했고, 40년을 연금과 망명과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는 데에는 우리 국민과 세계의 민주인사들의 성원의 힘이 컸다는 것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동시에 제 개인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첫째 저는 하느님이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속에 살아오고 있으며, 저는 이를 실제로 체험했습니다.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저는 한국 군사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이 긴급뉴스에 경악했었습니다. 한국의 정보기관원들은 저를 일본 해안에 정박해 있던 그들의 공작선으로 끌고 가서 전신을 결박하고 눈과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바다에 던져 수장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때 저의 머리 속에 예수님이 선명하게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붙잡고 살려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를 구원하는 비행기가 와서 저는 죽음의 찰나에서 구출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저는 역사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위협을 이겨왔습니다.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서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그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저는 죽음의 공포에 떨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데는 '정의필승'이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저의 확신이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국민과 세상을 위해 정의롭게 살고 헌신한 사람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반드시 승자가 된다는 것을 저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승자들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을 하더라도 후세 역사의 준엄한 심판 속에서 부끄러운 패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국왕 폐하, 그리고 귀빈 여러분!
노벨상은 영광인 동시에 무한한 책임의 시작입니다. 저는 역사상의 위대한 승자들이 가르치고 [알프레드 노벨]경이 우리에게 바라는 대로 나머지 인생을 바쳐 한국과 세계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여러분과 세계 모든 민주인사들의 성원과 편달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문일답>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 공동 수상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는가.
□같이 받았으면 참으로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위원장을 만나는 것과 노벨 평화상을 받는 두 가지 꿈이 실현됐다. 다른 꿈이 더 있나.
□노벨평화상은 받고나면 더 큰 사명이 부과된다는 점에서 올림픽 금메달과는 다르다. 더욱 열심히 할 생각이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데 대해 북한에서 인사말을 보내온 게 있는가. 또 통일은 김대통령 생애에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간접적인 축하의 말은 들었지만 공식적 축하는 없었다. 일생을 통일을 위해 헌신했고 어려운 고비도 넘겼지만 임기 중 통일을 성취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이산가족 상봉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
□지난 6월 이후 두 차례 에 걸쳐 400명이 왕래했다.그러나 이산가족은 2․3세대까지 포함하면 모두 1,000만명 가량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생사를 확인하고 편지 왕래,면회소 설치 등을 통해 이른 시일 내에 이루어 나갈 생각이다.
■지구상에는 아직도 미얀마나 동티모르 같은 인권 사각지대가 있다. 노벨상 수상자로서 인권문제에 대한 견해를 말해 달라.
□아웅산 수지 여사와 미얀마 국민의 민주화 염원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되기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동티모르에서는 한국 군인들이 치안유지 등 평화유지군의 활동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북한과 종교 교류를 지원할 생각은 있는가.
□한국에는 종교들간의 관계가 매우 좋다. 예를 들어 가톨릭을 포함해 불교․민속종교 등 7대 종교가 내가 귀국하면 노벨상 축하 미사를 서울의 대성당에서 드리기로 돼 있다. 남북 종교간에는 충분히 교류가 되고 있지는 않으나 북의 종교계와 대화를 하고 있으며, 남북한 종교간의 교류가 진전될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 문제는 장쩌민(江澤民)주석을 만나 교황청의 관계개선 희망을 전했고, 장주석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말했다. 여기에 대해 중국측의 반응이 있었다. 교황청이 대만문제를 해결하면 중국과 관계진전이 될 것으로 (나는)느끼고 있다.김정일 위원장에게도 교황의 방북의사를 전했고 의향을 물었다. 내년에 오시라고 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런 중국 및 북한과의 접촉결과는 모두 교황청에 전달했다.
■한반도 평화조약을 위한 4자회담을 제의한 것으로 아는데 언제쯤 평화협정이 체결될 것인지, 2002년쯤이면 될 것으로 생각하나.
□언제쯤이 될지는 확실히 답하기 어렵다. 4자회담 제의에 대해 미․중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다. 북한에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
■평화상 수상 이후 남북 관계가 어떻게 조정될 것으로 보는가.
□이번에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은 인권뿐 아니라 남북정상회담이 가장 큰 이유였다. 수상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를 (전세계의)절대적이고 가장 큰 이슈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대한매일 2000.12.11)
<[군나르 베르게]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위원장 발표문>
왕림하신 폐하 그리고 신사숙녀 여러분!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는 2000년 노벨평화상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김대통령은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기울인 평생의 노력,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이 상을 수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한 화해의 절차를 위해 상을 수여하는 것이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김대통령의 인권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이 최근 남북한관계의 진전과는 별도로 수상후보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과의 화해를 위한 강력한 김대통령의 다짐 및 이행과, 특히 지난 1년 동안 이룩한 업적이 이번 수상에 새롭고 중요한 몫을 더한 것도 역시 명백합니다.
국제 평화노력의 역전가능성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노벨상위원회는 "해보려고 애쓰는 시도가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평화상은 지금까지 이룩해온 조처에 대해 수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벨평화상의 역사에서 자주 보아온 것처럼 올해도 역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머나먼 길에 더욱 진척이 있기를 격려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는 넓은 범위에서 용기의 문제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고착화된 50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아마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전선 너머로 협조의 손길을 뻗으려는 의지를 지녀왔습니다. 그의 의지는 개인적, 정치적 용기이며 유감스럽게도 다른 분쟁지역에서는 너무 자주 결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삶에서 적용되는 똑같은 이치가 평화를 위한 노력에도 적용됩니다. 가장 높은 산을 등정하려할 때의 이치가 그것입니다. 첫걸음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등정길의 마무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동반자들에게 의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르웨이 남서부의 항구도시 스타번게르의 작가 군나르 롤드크밤은 그가 쓴 시 "마지막 한 방울"에서 다음과 같이 명료하면서도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옛날 옛적에
물 두 방울이 있었다네
하나는 첫 방울이고
다른 것은 마지막 방울
첫 방울은 가장 용감했네
나는 마지막 방울이 되도록 꿈꿀 수 있었네
만사를 뛰어넘어서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되찾는 그 방울이라네
그렇다면
누가
첫 방울이기를 바라겠는가?
현재 김대중씨는 민주한국의 대통령입니다. 김대통령의 집권까지의 노정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는 권위주의 독재체제와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을 했습니다. 그가 어디에서 그러한 힘을 찾을 수 있었는지 물어볼만 합니다. 그 자신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독재체제에 항거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추진해 갈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스스로를 강도가 침입한 집의 주인같이 느꼈습니다. 내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안위는 접어두고 맨손으로라도 침입자와 싸워야 했습니다."
1950년대 김대중씨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을 때, 경찰은 집권체제가 내세운 후보이외의 다른 후보에 대한 지지를 막고 나섰습니다. 1961년에 가서야 그는 피선되었지만 그의 성공은 단명했습니다. 3일 후에 일어난 군사쿠테타로 국회는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단념치 않았습니다. 1963년 거의 10년 세월의 정치적 투쟁 끝에 그는 드디어 야당의원으로 국회의석을 차지했습니다. 꼭 덧붙여 말씀드려야 할 것은 여당이 그를 매수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매수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씨는 상당한 투표조작에도 불구하고 유효투표의 46%를 획득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는 군사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여러 해를 처음에는 감옥에서 나중에는 가옥연금과 일본과 미국에서의 망명생활로 보냈습니다. 그는 또 납치와 암살기도를 겪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시련을 어떻게든 견디어내면서 그는 체제에 대한 뚜렷한 반대입장을 지속해 나갔습니다.
노르웨이 국회대표단의 일원으로 나는 1979년 한국을 방문했으며, 그 방문을 통해 김대중씨 지지자들과 접촉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스칸디나비아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로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가혹한 교도소환경 속에서도 김대중씨는 삶을 바쳐서 해야 할 일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불굴의 낙관적 태도를 가지고 그는 교도소 안에서 발견한 "즐거움"에 대하여 썼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모든 종류의 서적 통독이 그것입니다. 신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 그리고 문학서적들입니다. 가족과의 짧은 면회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갖가지 방해시도가 있었음에도, 그와 가장 가까웠던 인사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정원에서 꽃을 돌보는 일도 허용되었습니다.
김대중씨의 얘기는 몇 몇 다른 평화상수상자, 특히 넬슨 만델라와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경험과 공통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을 받지는 않았지만 수상할 자격이 있었던 마하트마 간디의 그것과 함께 말입니다. 김대중씨가 간직한 불굴의 정신은 국외자들에게 거의 초인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수상은 보다 진지한 면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6,7차례 투옥되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은 나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겁이 많다. 그간의 경험에서 볼 때, 투옥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철창에 갇힐 때마다 너무 무섭고 초조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김대중씨는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 더 출마했습니다. 군사정권이 그의 길을 막고 있지 않았다면 지역으로 첨예하게 갈라진 한국에서 그의 출신지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투쟁에 지친 그는 드디어 1992년 선거 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1997년, 김대중씨는 새로운 기회를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정적들이 서로 분열된 가운데 군사정권의 주요 적수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정말 드디어 한국이 세계 민주주의국가 대열에 오르게 되었음을 확실히 입증한 것입니다.
새 대통령은 보복할 생각을 틀림없이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의 경우처럼 용서와 화해가 김대중씨의 주요 정강정책들이 되어 그를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김대중씨는 용서할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용서했습니다. 대신, 민주적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혁명후에도 구질서의 일면은 남게 마련입니다. 민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은 법제도와 보안법 문제에 관한 한 개혁해야 할 부문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하면 한국의 교도소에는 정치범으로 장기형을 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노조 결성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근 반세기동안 민주주의를 앞장 서 대변해온 김대통령이 민주화 과정을 마무리해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현재 아시아에서는 인권에 관한 중요한 토론이 진행중입니다. 혹자는 인권이 서방에서 나온 것으로 서구의 정치적, 문화적 지배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합니다. 김대중씨는 이러한 시각을 부정하면서 보편적인 인권과 다른 아시아적인 특별한 인권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금년도 평화상시상의 근거로 노벨상 위원회는 똑같은 생각을 갖고, 동아시아의 인권상황 진전에 김대중씨가 맡은 중요한 역할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된 것입니다. 1996년의 평화상 수상자인 호세 라모스 오르타씨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씨는 동티모르의 대의를 위해 온힘을 기울였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적 반대를 탄압하는데 사용되었던 한국군이 이제는 동티모르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가토록 결정하는데 엄청난 상징적 힘이 발휘되었습니다. 김대중씨는 또한 1991년도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가 미얀마의 독재에 항거, 영웅적인 투쟁을 벌이는 것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과거 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그녀와 함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미얀마 정권은 또 다시 아웅산 수지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씨는 한국의 전면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과 적극적인 협조관계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햇볕"이라는 말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햇볕과 바람이 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한데서 따온 것입니다. "햇볕정책'은 바람을 막지 않더라도 남북한이 공동의 이익을 서로 나누고 이를 강화함으로써 최소한 추위를 누그러뜨리자는 것입니다. 김대중씨는 남한이 북한을 합병하거나 흡수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시간이 걸리고 아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목표는 통일인 것입니다.
김대중씨가 현재 진행중인 해빙과 화해의 주동자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마 그의 역할은 동서독간의 관계정상화에 아주 중요한 동방정책(ostpolitik) 추진으로 노벨 평화상을 탄 빌리 브란트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만으로는 통독이 불가능했지만 1989-90년의 독일통일에 필수불가결 했습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통독의 정치적면은 매력적으로 보이겠지만 경제적 비용이 독일보다 훨씬 더 들것이란 점에서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지난 6월 김대통령과 김정일 지도자간의 대화는 보다 느슨한 선언과 경쾌한 수사(修辭)로 발전되었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장면은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접촉이 아무리 제한되고 통제된다 하더라도 기쁨의 눈물은 판문점의 모든 방문자들이 절실히 느끼는 추위와 증오, 그리고 낙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북한주민들은 오랫동안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그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거나 엄청난 정치적 탄압에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북한 지도자들은 남북한 화해를 향해 첫발을 내딛게 한 역할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냉전의 빙하시대는 끝났습니다. 세계는 햇볕정책이 한반도의 마지막 냉전 잔재를 녹이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과정은 시작되었으며 오늘 상을 받는 김대중씨 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분은 없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첫 번째 떨어지는 물방울이 가장 용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