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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밥

무릎팍도사,허재신화는 마이너리티정신

by 밥이야기 2009.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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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트는  문화연예(tv),스포츠(농구) 분류에 포함하는 것 보다

  시사 사회면이 더 맞는 것 같은 판단이 들어 글보내기 했음을 양해바랍니다.


- 무릎팍도사,허재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mbc


허재는 마이너리티?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허재 감독. 그를 볼 때마다 중앙대 시절의 허재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허재 하면 농구천재, 농구대통령, 한국의 마이클조던, 농구의 악동 등 여러 이름이 교차한다. 그렇지만 허재의 신화를 다르게 평가 하고 싶다.

 용산고를 졸업한 농구스타 허재는 중앙대를 입학했다. 알다시피, 대학 스포츠는 이른바 고려대와 연세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고연전, 연고전으로 불리는 대학스포츠의 왕좌는 두 대학이 오가며 차지했다. 두 대학의 친선대회는 친선대회를 넘어 방송국과 언론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대학교 스포츠는 두 대학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포츠인맥이라고 불리는 뿌리는 사실 고대와 연대다. 마치 미술 대학을 떠올릴 때 서울대와 홍익대를 이야기 하듯.


 


 ▲농구 실력에서 마이너리티가 아니었지만, 마이너리티가 되어 중앙대 농구 신화를 이루어 내었던
 허재. 김유택, 강동희, 한기범 선수.



또 다른 신화는

허재를 평가할 때, 그의 천재성보다는 고대, 연대를 축으로 하는 스포츠의 신화를 무너뜨린 점을 평가하고 싶다. 스포츠학력엘리트주의는 80년대 중반 중앙대 농구 신화를 만든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과 이들 선수들의 능력을 조화시켜낸 중앙대 정봉섭 농구감독의 열정으로 무너졌다. 물론 이들이 신화 아닌 권위의 신화를 무너뜨리게 한 배경에는 중앙대와 농구스타들의 부모님 뒷바라지와 지원이 가장 컸을 것 같다. 허재의 농구사랑을 만들게 한 가장 큰 후원자는 그의 아버님이었다.

 
만약 허재가 중앙대를 입학하지 않고 연세대에 입학했다면 한국의 80,90년대 농구는 어떤 모습 있었을까. 아마 연대, 고대가 계속 땅에는 호랑이, 하늘에는 독수리의 위용을 떨치며 장악하지 않았을까? 무릎팍도사를 보면서 계속 중앙대 시절의 허재와 중앙대 선수들의 모습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가 허재가 만든 또 다른 신화 때문이다.

중앙대 농구신화는 다른 대학에도 가능성과 꿈을 열어 주었다. 이들의 신화는 중앙대를 졸업하고 기업의 고연으로 불리는 삼성과 현대에 입단하지 않고 기아를 선택했다. 두 번의 농구신화가 열렸다. 이들 선수의 재능과 실력을 평가하기에는 농구공만 보면 숨을 헐떡이는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말하고 쉽지 않다.

 허재. 스타이기 때문에, 일인자이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학연과 지연이 좌지우지 하는 사회에서, 기득권을 버리고 스스로 마이너리티가 되어 중심에 우뚝 선, 이면에 감추어진 선택과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결국 무릎팍도사 허재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80년대 허재와 중앙대가 만들어낸 신화가 더 뭉클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허재의 삶은 영화가 아닌 또 다른 마이너리티 리포트다. 세상의 마이너리티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현실의 신화는 말만 넘치는, 다 차려진 밥상에서 이루어 지지 않는다. 현실의 꿈은 사회제도가 아니라 선생,학생, 학부모들이 소통할 때 만들어 진다. 새벽 한치 앞을 볼 수 없이 시야를 가로 막는 안개처럼, 마이너리티,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가 왜 이리 멀리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