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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밥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by 밥이야기 2010.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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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블로그 화면 캡처

 



트위터 라인을 보니, 고재열, 허지웅이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문장을 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김규항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관련 글까지 썼다. 한겨레신문 김외현 기자가 쓴 트위터 브리핑 기사제목도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 세 사람의 생각을 정리한 기사다. 여기서 트위터는 뉴미디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소셜 네트워킹, 소셜 미디어의 상징적 도구이자 함의적 표현이다. 서로 대체 교환 될 수 있는 말이다.

 

필자도 소셜네트워킹 관련 강의를 하면서, 발표 자료에 ‘블로그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블로그는 트위터로 소셜미디어로 상황에 따라 첫 이름만 바뀔 뿐. 세상을 바꾼다는 그대로다. 책 제목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한다. 김규항씨 말대로 대기업 광고에도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이런 표현을 쓰면서 낯간지러울 때가 많다. 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일 뿐이다. 삼성이나 엘지 입장에서는 물건이 많이 팔리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고, 변화를 좋아하는 사회변혁가들에게는 소셜미디어가 세상을 곧 바꿀 것 같다는 믿음과 환상을 준다. 미국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 메기 잭슨의 말처럼 지금 우리는 암흑기 혹은 영국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대변혁기 앞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칸도 인류 역사의 위대한 전환기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개념이 변하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환이 누구의 삶을 좋게 하는지, 세상을 바꾸었지만, 민중의 삶을 나아지게 했다고 할 수 는 없다.

 

소셜미디어가 특정 전문가나 집단(언론을 포함한 여론 주도층)의 벽을 허물어 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여기서도 여론 소셜미디어 여론 주도층은 다시 다른 얼굴로 부상한다. 쏟아지는 정보량은 엄청나지만 옥석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미국에서는 소셜미디어와 관련 분기별로 재미난 통계 동영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자료를 보면 트위터의 경우 5%미만의 트위터 사용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바꾼다’는 문장에 대한 규정과 범위가 필요하다. 소셜미디어에서의 지향인 것인가? 홍보인가? 지금 현재의 세상을 어떻게 볼까. 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실에서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소셜미디어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질문에서부터. 소셜미디어 세상 내부에서는 변화가 이루어지겠지만, 과연 현실에서는 얼마나 변화를 앞당겨 낼 수 있을까? 그 변화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예를 들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그 비판을 넘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반 이명박 세력이 정권을 탈환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비판 자체 많아지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SF작가 윌리엄 깁슨은 사이버 공간을 “사람들이 교감하며 일으키는 환각”이라고 말했다.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소셜미디어에서 쏟아지는 비판의 목소리와 대안적인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단초를 마련해 준다. 영향력은 커질 수 있다. 압력을 가하고, 변화를 촉구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어 지지 않는다. 설령 문명의 대전화기가 온다고 해도 그걸 소셜미디어 혁명 때문이라고 단순히 규정할 수 없다. 복합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동시성을 가능케한 전보를 트위터(소셜미디어)의 시초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다. 전보와 전화의 발명은 인류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이제 인터넷에서 속도의 날개를 달고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소셜미디어가 없었을 때도 사회변혁과 혁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지향일 뿐이고, 세상을 바꾸는 작은 단초일 뿐이다. 현실의 삶에서 세상을 크게 바꾸어 낼 수 없다.

 

현실의 운동과 결합해서 시너지효과를 이루어 낼 수 있을지, 그 기능성과 활용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내일 하루 모든 전기가 끊기고, 인터넷과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참 좋은 말이지만, 바뀐 삶이 어떤 삶인지 바뀌어야 할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소셜 미디어를 언급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고?

 아침에 트위터에서 고재열 씨(@dogsul)와 허지웅 씨(@ozzyzzz)가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 못 바꾼다 티격태격하는 걸 봤다. 고재열은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쪽이고 허지웅은 트위터는 도구일 뿐이며 중요한 건 그 안에 뭐가 담기는가라는 이야기다. 나는 허지웅에 동의한다. 세상은 '세상을 바꾸는 운동'에 의해서 바뀐다. 그 운동이 책에 담기는가 인터넷에 담기는가 촛불에 담기는가 트위터에 담기는가의 차이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세상을 바꾸는 운동인가, 다. 지배체제의 숙제는 그 운동을 막는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처럼 모조리 간첩으로 몰아 없앨 수 없는 오늘, 체제는 좀더 교활하게 숙제를 수행한다.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 아닌 걸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 인터넷과 트위터 세상에서 차고 넘치는 ‘카타르시스로서의 반이명박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끼리, 혹은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명박을 욕하고 조롱하는 반이명박 운동 말이다. 그 운동은 사실 세상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명박을 반대하던 사람들과 이명박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반대하고 지지할 것이고, 그 중간에서 부유하던 사람들은 그런 욕과 조롱에 설득될리 없으니 말이다. 그 운동의 유일한 의미는 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노와 싸움이 정작 그 지배 체제, 즉 이건희를 비롯한 자본의 체제를 향하지 못하고 카타르시스되어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명박 패거리가 지배 체제 아니냐고? 이명박과 그 패거리는 지배 체제의 집행관이자 행동대원일 뿐이다. 우리는 지배 체제가 이명박만 집행관으로 쓴 게 아니라 김대중이나 노무현마저 집행관으로 썼다는 가공할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를테면 이번에 천신만고 끝에 1심 승소한 KTX 노동자들은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에 의해 부당해고 되었었다.) 그래서 오늘 민주당이나 국참당이 말하는 ‘정권교체’란 실은 ‘집행관의 교체’를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싸움은 그런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걸 직시하지 않는 모든 싸움은 트위터든 촛불이든 인터넷이든 책이든 카타르시스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을 선사하는 카타르시스 말이다.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공언하는 고재열 씨는 자신이 수만명의 팔로어를 가진 ‘파워 트위터러’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 수만명의 팔로어는 ‘카타르시스로서의 반이명박 운동’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뒤집어 말해서, 고재열 씨가 이명박과 그 패거리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지배 체제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했어도 팔로어가 수만명이었을까?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이 질문을 충분히 되새겨 본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출처:김규항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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