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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밥

전태일의 꿈이 자라 나는 꿈꾸는 공장

by 밥이야기 2010.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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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평화시장의 다락방에서 새우잠을 자며 때론 잠을 쫓는 약까지 먹어가며 하루 14~16시간씩 좀 더 나은 삶과 기술자가 되고자 하는 희망 하나로 일을 했던 그녀들.

이제, 그녀들은 40대가 넘어 어떤 옷이든 척척 만들어 내는 미싱 기술 전문인이 되었지만, 봉제의류산업은 사양화 산업이니 더 이상의 희망을 갖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고숙련공인 그녀들보다는 오히려 값싼 노동력이 풍부한 이웃나라, 중국·베트남에서 생산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뒤 한번 돌아볼 겨를 없이 그토록 열심히 살아 전문인이 되었는데도, 왜 그녀들의 삶은 나아지고 있지 않은지, 그 원인을 찾아내고 대안을 만들어 가는 ‘참 신나는 옷’ 의 미싱 장인들을 만나봤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의 표정은 어떤가요?

‘참 신나는 옷’을 만드는 사람들

 

 

꽃다운 열아홉부터 일본 수출용 점퍼 만드는 봉제공장서 주머니 짜는 일을 해왔다는 제갈복화(40세) 씨의 꿈은 느즈막히 아이롱(다림질) 일을 하는 남편과 함께 세탁소를 내는 일이다. 남편은 다림질을 하고, 자신은 수선을 도맡는 게 그녀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

 

 

20년 넘게 봉제일을 해오다 건강까지 잃을 뻔했던 천경순(45세) 씨도 새로운 꿈을 키워가고 있다. 몇 년 전 도전했던 운전면허증에 이어 이번엔 못다한 공부에 도전해볼 참이라고. 열아홉부터 양장점서 미싱 기술을 배웠다는 곽미순(49세) 씨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지금 다니는 회사가 잘 되어 공부방이 필요한 아이, 등록금이 필요한 아이들을 돕고 싶어 한다.

꿈이 있어 행복한 세 여자들은 모두 지난 10월 7일 문을 연 소규모 봉제공장 ‘참 신나는 옷’의 직원들이다.

 

하루 8시간 노동, 주 5일 근무, 꿈을 키울 수 있는 근무환경

 

 

장충동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은 ‘참 신나는 옷’은 작은 규모의 봉제공장이다. 그러나 칙칙한 골목길의 봉제공장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이리저리 쪼가리 천을 덧댄 듯한 패치워크 문양의 알록달록한 건물처럼, 여느 봉제공장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1층 전시실, 2층 생산실, 3층 재단실로 이어진 건물 내부는 마치 삼청동 어디쯤에 자리잡은 디자이너의 작업실을 연상케 한다. 총 직원수는 25명. 그 중 봉제공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2층에 근무하는 생산실 직원은 15명이다. 파스텔톤의 밝은 분위기는 물론, 열심히 미싱 돌리는 직원들의 자부심 가득한 표정 또한 남다르다. 그야말로 사기충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직원들은 여느 봉제공장 직원들과 임금은 물론 근무시간부터가 아예 다르다. 4대 보험은 물론, 주 5일제에 하루 8시간 근무가 기본이다. 행여 밀린 일로 야근이라도 하면 야근비 또한 필수다. 이렇게 해서 받는 임금은 최저 120만 원에서 최고 250만 원선. “동종업계에서 직원들이 갖고 있는 기술력에 걸맞는 대우”라는 게 신현섭 생산부장의 설명이다.

 

생산부장을 비롯해, 봉제팀장, 미싱팀장, 생산직 직원들의 평균 경력은 무려 20년. 그중 90% 가량이 ‘참여성노동복지터’가 운영하는 패션/봉제 기술학교 ‘수다공방’ 졸업생들이다. 처녀시절부터 시작한 20년 경력을 바탕으로 이론과 실기를 다시 다져서 이곳에 왔으니, 그 실력은 짐작될 터.

 

1기부터 7기까지의 수다공방 졸업생들이 주를 이루다보니 분위기도 남다르다. 새얼굴이 등장하면 으레 따라붙는 ‘텃새’도 이곳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모두가 불우했던 봉제공장 노동자 생활을 경험했던 터라, 사십평생에서야 만난 직장다운 직장을 꼭 지켜내리라는 굳은 의지 또한 같다. 명동 의상실서 시다(심부름)로 시작해 이제야 팀장직에 올라섰다는 최창성 봉제팀장은 “내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감동 그 자체”라 말한다.

 

직원들이 직접 밥을 지어 점심을 나눠 먹는 것도 색다른 풍경 중 하나다. 쌀은 아예 사다놓고, 당번을 정해 국을 끓여오는 것이다. 인심도 후덕해 김장 끝낸 순으로 배추를 한 포기씩 가져와 이미 냉장고는 배부르단다. 바로 이곳이 꿈이 있는 봉제공장 ‘참 신나는 옷’의 풍경이다.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오니, 사회적 기업이 있네

 

 

사실 이곳 사람들은 알고보면 얼추 한다리 건너 아는 사이들이다. 참여성노동복지터(이하 ‘참터’)와의 인연이 그 시작이다. 신현섭 생산부장과 곽미순 씨는 아이들을 창신동 일대의 봉제공장 노동자 자녀를 대상으로 한 참터에서 운영하는 방과 후 지역아동센터 ‘참 신나는 학교’에 보낸 학부모 사이다. 이를 계기로 수다공방과 인연을 맺게 된 두 사람은 지금은 같은 공간서 일하는 동료가 되었다. 반면 수다공방 1기생으로 교육을 받았던 이지영 씨는 그 인연으로 ‘참 신나는 장학회’를 만나 아들의 고등학교 등록금을 후원받기도 했다. 결국 참터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학교와 장학회, 수다공방, 그리고 ‘참 신나는 옷’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이는 각각의 탄생배경과 다르지 않다. 참터의 대표이자 고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 대표는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와보니, 그 끝이 사회적 기업이었다”고 밝힌다. 1998년 무렵, 긴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전 대표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봉제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 70년대 그대로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초고속 경제성장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올곧이 노동으로 바쳐야했던 봉제 노동자들이 이번에는 중국과 베트남의 값싼 노동력에 치여 불필요한 존재로 낙인 찍혀가고 있던 것이다. 곧 그는 창신동을 비롯한 낙후된 지역의 봉제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한 조건을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노동자들이 내놓은 해답이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과 공동의 작업장, 그리고 신나는 일터였다.

 

이리하여 수년에 걸쳐 ‘참 신나는 학교’와 ‘참 신나는 장학회’ 그리고 공동의 작업장인 ‘수다공방’과 그들의 든든한 일터가 되어줄 ‘참 신나는 옷’까지 탄생하게 되었다. 숙련된 기술로 고급화된 상품을 만들고, 사회로 환원된 그 수익으로 다시 학교와 장학회, 그리고 수다공방을 지원하는 이른바 사회적 기업의 모양의 틀이 저절로 갖춰진 셈이다. 함께 모여 열심히 일해 돈도 벌고, 번 돈을 떼어내 또 함께 아이도 키우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술도 연마하는 자급자족의 시스템. 이것이 바로 ‘참 신나는 옷’이 지향하는 ‘사회적 기업’의 밑그림이다.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많은 사람들이 ‘참 신나는 옷’의 개업을 놓고 격려와 걱정을 동시에 보냈다고 한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그 의미야 좋지만, 아직까지는 걸음마 수준에 불과한 국내 사회적 기업의 위치를 볼때 시행착오가 생기지 않겠냐는 우려다. 더불어 하필 이런 혹독의 시기에 개업을 했냐는 지적도 있었다. 그런 지적에 전 대표의 답변은 명쾌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의 봉제기술은 경쟁력이 높습니다. 70년대부터 이어온 봉제 노동자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를 고급화시켜 더이상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이 아닌 ‘메이드 인 코리아’로 바꿔볼만한 가치가 있는 거죠. 저임금 구조에서 벗어나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그 시작입니다.” 평균 20년 경력에 수다공방서 1년간 쌓은 고급 이론과 실기로 무장한 기술력이야 말로 ‘참 신나는 옷’이 띄운 승부수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을 둘러싼 ‘기술은 없고 나이든 사람만 많이 있다’는 선입견도 확실히 깨줄 생각이다.

 

 

현장에서 보여지는 직원들의 ‘각오’ 또한 남다르다. 개인적으로야 이웃사촌처럼 가까운 사이지만, 일단 작업장에 들어서면 분위기는 180°달라진다. ‘잡담금지’, ‘핸드폰 사용금지’는 생산실의 불문율과 같다. 작은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좋은 뜻으로 모였지만, 상품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두 번 찾지는 않게 된다. 결국 100% 만족하는 제품을 만드는 일이 우선”이라는 전 대표의 이야기에 모두가 십분 공감하기 때문이다.

 

현재 ‘참 신나는 옷’의 주요 거래처는 여러 기업들과 노조다. ‘착한 소비’와 ‘사회 책임적 소비’로 활로를 찾겠다는 모색이다. 자체 브랜드로 스타트를 끊은 ‘스위트숍(Sweet Shop)’ 역시 단체복 전문 브랜드다. 노동착취 공장이라는 뜻의 ‘스웨트숍(Sweat Shop)’을 비꼰 표현이란다.

 

가격 역시 ‘저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여타 소규모 봉제공장에 비해 한 단계 높은 편이다. 이 역시 고가와 저가만이 난무하는 현재 국내 의류업계를 통찰한 ‘틈새’를 노린 전략이 숨어있다. ‘싼 옷을 많이 사서 한철 입고 버리는 것 또한 노동력의 낭비이자 자원낭비’라는 게 전 대표의 설명이다. 대신 미싱을 돌리며 앞으로 이 옷을 입을 사람을 생각하며, 정성을 들여 만든 옷, 귀하디 귀하게 만든 옷을 되돌려주겠다는 것이 ‘참 신나는 옷’의 신조이다. 이를 바탕으로 내년에는 아토피 걱정없는 천연소재의 아동복과 천연염색을 통한 여성복 브랜드도 내놓을 계획이다.

 

이를 위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생산실의 미싱은 바삐 돌아간다. 15명의 미싱사와 보조들이 양쪽 라인으로 앉아 분주히 움직인다. 한 미싱사가 소맷단을 박으면, 다른 미싱사는 주머니를 박고, 또 다른 미싱사는 칼라를 마무리한다. 이렇게 전 라인이 돈 후에야 귀하디 귀한 옷은 완성된다. 이중 한 명만 빠져도 ‘참 신나는 옷’의 ‘마음이 담긴 옷’은 완성되지 못한다.

 

오늘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의 표정은 어떠한가? 화려한 디테일과 디자인 속에 ‘나를 위한 진심’이 느껴지는가? 한뜸한뜸 박음질 사이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 번쯤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챙겨볼 일이다.

 

 

 

전순옥 대표는 사회적 기업을 표방하는 '참 신나는 옷'의 큰 틀을 자신의 오빠이기도 한 고 전태열 열사의 일기장에서 얻었다 밝힌다. 1969년 그가 쓴 ‘모범업체 설립 기획’이 그것이다. 총 157명의 직원과 자본금 3천만원, 노동시간 8시간 이하, 미싱사의 급여 3만원(당시 교사월급 2만원), 직원들을 교육할 5명의 교사 등이 바로 그 일기장에 적혀 있었단다.

 

 

신나는 옷을 만드는 신나는 그녀들

 

 

나이 마흔에 다시 시다에 도전하다

제갈복화(40세) 씨

“출산과 육아를 거쳐 재취업에 나선 내게 사람들은 보험을 해라, 점포 점원을 해봐라, 식당 가서 서빙을 하라 조언했죠. 하지만 다 싫었어요. 저는 그저 제가 잘하는 노동력으로 일하는 만큼 월급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4년간의 미싱사 경력, 5년간의 자체 검품사 경력을 갖춘 그녀가 택한 직업은 ‘참 신나는 옷’의 시다다. 약 10년간 봉제공장서 일했지만 옷 하나를 만들 줄 모르기 때문이다. 주머니, 밑단, 칼라 같은 한 공정이 아닌 옷 하나를 온전히 내손으로 만들고픈 바람으로 수다공방을 찾은 그녀는 1년의 교육과정 끝에 신나는 일터에 합류했다.

 

 

 

모두가 잘 사는 내일을 꿈꾼다

천경순(45세) 씨

“십대 때부터 장갑공장을 다녔어요. 어깨 너머로 배운 미싱으로 10년을 일했죠. 느즈막히 결혼한 뒤로는 홈패션을 배워 침대커버, 커튼만 10년 넘게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몸이 아프더라고요.” 봉제노동 20년 만에 천 씨는 허리통증으로 고생하다 우울증까지 겪었다고 한다. 이때 만난 게 바로 수다공방. 그곳에서 1년간 교육받고, ‘참 신나는 옷’까지 오게 된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 뿐이다. 라인 위에서 땀흘리는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내 기술에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

곽미순(49세) 씨

“열아홉에 동대문 동화시장서 미싱을 시작했죠.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까지 일해가며 미싱을 배웠어요. 전 미싱이 적성에도 맞고, 옷 만드는 일도 좋았어요. 그만큼 제 일에 자부심이 있어요.” 동대문, 남대문 시장서 잔뼈가 굵은 곽 씨는 지금은 여고생인 작은딸이 ‘참 신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수다공방과 인연을 맺었다. 수다공방 1기생으로, 올해엔 수다공방의 강사로 서기도 했던 베테랑 미싱사다. 두 딸의 옷을 직접 해입힐 만큼 그 실력을 자랑한다. 열심히 일해 그 수익으로 월급도 오르고, 사회에 환원도 하고 싶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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